| 우리는 흔히 자서전을 ‘사실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했는가’의 문제로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자서전이 사실을 재현하는 글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하나의 ‘형식’이라면 어떨까? 이 글은 마크 프리먼과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논의를 따라, 자서전이 어떻게 인간 이해의 핵심적인 내러티브 탐구가 되는지를 살펴본다. |
1. <자서전적 이해와 내러티브 탐구>
그러나 본문에서 논증하겠지만, 바로 이 차원(=자서적 이해의 시적 차원) 자체가 내러티브 탐구에 대한 보다 충만한 개념과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것이 지닌 가능성, 나아가 과학 그 자체에 대해서도 더 포괄적이고 충분한 개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As shall be argued herein, however, it is this very dimension that can open the way toward a fuller conception of narrative inquiry and its promise in understanding the human condition as well as a more capacious, and indeed adequate, conception of science itself.
- <자서전적 이해와 내러티브 탐구>
마크 프리먼(Mark Freeman)은 자서전은 인간의 삶을 통해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는 내러티브 탐구의 가장 핵심적인 접근 방식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근본적인 내러티브 탐구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귀스도르프(Georges Gusdorf, 1912-2000)가 언급한 '자서전의 조건과 한계(conditions and limits of autobiography)(Gusdorf, 1956/1980)'를 중심으로 한 이 논의는 자서전이 지닌 역사적 탄생과 변화를 살펴보며, 기억과 자서적 서사가 어떻게 '자기(self)'를 형성하는지를 탐구합니다.
비록 서구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한계와 비판이 존재하지만, 자서전은 과학과 예술의 간극을 좁히고 인간을 보다 통합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죠. 특히 자서적 글쓰기의 시적 차원(poetic dimension)은 과학적 진실성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내러티브 탐구와 인간 과학의 범위를 확장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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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화적 의식으로부터 역사적 의식으로
인간의 조건은 보편적으로 논의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되고 서사화되는지는 문화마다 크게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개인의 고유한 삶보다 공동체 속 역할과 반복되는 질서가 더 중요하며, 내러티브 역시 개인의 사적 이야기가 아니라 공적이거나 집단적 자산에 가깝습니다.
신화적 세계관에서는 삶이 개인의 '나의 삶(my life)'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삶들을 초월하는 신화(mythical story)의 반복적 실현으로 이해될 뿐이죠. 이 경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이미 주어진 이야기를 다시 사는 것이며, 현재의 관점에서 개인의 과거를 평가적으로 되돌아보는 자서적 이해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구 중심적 자서전 개념은 제한적이라는 비판이 타당하지만, 현대 내러티브 탐구에서 지배적인 방식(개인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자서적 이해)을 깊이 분석하기 위해 논문은 이 특정한 모델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논문은 서구 역사 속에서 점차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죠.
이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특별한 관심을 받을 만한 존재라고 믿는다. (...) 나는 중요하다, 나의 존재는 세계에 의미를 지니며, 내가 죽는다면 세계는 불완전해질 것이다. 내 삶을 서술함으로써 나는 죽음 너머에서조차 나 자신을 증언하고, 사라져서는 안 될 이 소중한 자본을 보존할 수 있다.(the man who takes delight in thus drawing his own image believes himself worthy of a special interest…. I count, my existence is significant to the world, and my death will leave the world incomplete. In narrating my life, I give witness of myself even from beyond my death and so can preserve this precious capital that ought not disappear.)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조르주 귀스도르프에 따르면 자서전을 쓰는 인간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세계에 중요하다고 믿으며,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죽음 이후에도 자신을 남기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서적 이해는 과거의 삶과 현재의 시선 사이의 차이를 전제로 합니다. 삶은 살아가던 당시에는 알 수 없던 의미를 현재에서 다시 구성되며, 우연과 갈등, 선택과 후회같은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엮입니다. 바로 이 간극 속에서 자서전적 의미가 발생하죠.
나아가 자서적 이해는 역사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역사의식이란 영원히 반복되는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과거가 어떻게 현재로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하려는 의식을 말합니다.
"원시적 인간(The "“primitive")", 즉 고대적 인간(the archaic man)은 이전에 다른 존재(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에 의해 이미 설정되고 살아졌던 행위가 아니면 어떤 행동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이미 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What he does has been done before). 그의 삶은 다른 이들에 의해 처음 시작된 몸짓과 행위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이다.
(...)
즉, (신화의 목적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을 만들어내는 데 있거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전해져 온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데 있었다. 따라서 원초적 내러티브는 본질적으로 재현적(recreative)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초기 내러티브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던 신화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될 수 있는 전통적인 구성 혹은 줄거리(traditional plot or storyline)였으며, 대체로 공동체가 자신의 신성한 기원과 조상들(their holy origins and ancestors)을 기억하기 위해 낭송되는 신성한 의례적 기능(sacred ritual function)을 지니고 있었다.
- <영원한 귀환의 신화(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 1954)>
이에 비해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와 조르주 귀스도르프가 설명하는 신화적 인간은 이미 행해진 것만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개인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조상들의 역할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존재이며, 공동체의 정체성은 반복과 영원회귀를 통해 유지됩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개인적 자기 성찰보다 집단적 동일성이 우선하죠. 이러한 상황을 미르체아 엘리아데, R. 커니(R. Kearney) 그리고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전자서전적(pre-autobiographical)이라고 봅니다.
자서전은, 엄밀한 의미에서(properly speacking), 자기의식(consciousness of self)가 존재하지 않는 문화적 환경(cultural landscape)에서는 불가능하다.
- 조르주 귀스도르프
따라서 자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는 세계에서는 자서전 역시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화적 세계는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는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질서와 반복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죠.
자서전은 서구 문명의 후기 산물이다.(Autobiography is a late product of Western civilization.)
(...)
자서전의 등장은 개별적 의식(individual consciousness)의 출현과 동시에 일어난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물론 조루즈 귀스도르프의 개인 중심적 자아 개념은 서구적이고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개인화된 자아와 자서전이 비교적 늦게 등장했다는 큰 흐름 자체는 여전히 설득력을 지닙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는 현대적 의미의 개인 자아나 자서전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죠. 인간은 공동체에 통합된 존재였고, 자기 이해는 곧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인간은 현재가 과거와 다르며, 그 과거가 미래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유사성보다는 차이에 더 민감해졌고, 끊임없는 변화와 사건과 인간의 불확실성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고정해 두는 것이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란 예측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형태와 존재의 붕괴에 맞서 투쟁하는 인류의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각 개인은 세계에 중요하며, 각 삶과 각 죽음은 의미를 지닌다.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행위는 공동의 문화적 유산을 풍요롭게 한다.
(...)
인류는 역사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율적인 모험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 있는 행위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며, 전기(biography)는 기념물·비문·조각상과 나란히, 인간의 기억 속에 오래 남고자 하는 욕망의 한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된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하지만 인간이 신화의 반복 세계를 벗어나 불확실성과 변화가 지배하는 역사 속으로 들어서면서, 각 개인의 삶과 죽음은 점차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자기 이해와 자기 서술의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죠.
이성을 통해 우리가 접근하게 되는 도덕적 근원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선(善, the Good) 속에, 다시 말해 우리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혹은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가는 이러한 접근은, 우리와 이 선의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사이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만들기(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1989)>
플라톤 시대에도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초월적 선(善)에 근거한 것이었고, 내면화된 개인적 자서적 이해는 아니었습니다.
신(God)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는 눈 자체에 힘을 부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의 빛은 플라톤에게서처럼 존재의 질서를 비추는 어떤 '외부에 있는(out there)' 빛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면의(inner)' 빛이기도 하다.
(...)
이는 알려진 대상들의 영역에서 알고 있음이라는 행위 그 자체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 공적이고 공유되는 대상들의 영역과는 달리, 앎의 행위는 개별화되어 있다. (...) 이 행위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self)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 다시 말해 성찰적(반성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만들기(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1989)
이 전환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입니다. 여기서 기억, 내면 성찰, 1인칭 시점이 결합되며 자아는 처음으로 경험의 주체로서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적 이해는 여전히 신에게 향해 있으며, 완전히 현대적인 개인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 자아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신화에서 역사로의 전환, 그리고 자서적 이해의 완성은 이 시점에서도 아직 미완의 과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1-2. 자서전적 이해와 근대적 자아
근대로 넘어오면서 자서전적 이해의 중심축이 '신'에서 '인간(혹은 개인)'으로 이동합니다.
| 전근대 자서전의 특징 |
| 1) 자서전의 주체는 자아(self)가 아니라 영혼(soul) 2) 삶의 방향과 의미는 신의 섭리에 의해 이미 결정됨 3) 개인의 과거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 4) 자기 성찰은 죄와 타락에 대한 성찰 5) 남성의 서사적 원형은 모험(ex) <오디세이>), 여성의 서사적 원형은 신비 체험 서사 |
중세까지는 신의 계획 혹은 초월적 질서 아래 삶이 전개되었으나(필연성), 근대에는 개인이 자신의 미래를 형성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삶은 불확실해졌고(우연성),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는 자서전적 시선이 필요해졌습니다.
| 근대적 자서전 관련 인물 | 인물의 특징 |
| 미셸 에켐 드 몽테뉴 (1533-1592) |
고백하지만 참외는 없음 개인성, 진정성, 모순을 긍정 |
| 장자크 루소 (1712-1778) |
기억의 왜곡 가능성은 인정 but 객관적 자기 서술은 가능하다고 믿음 |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
나(I, 주체)와 나 자신(me, 객체)은 분리 불가능->주관적 관점 존재 자서전은 경험된 현실이며 사실의 나열이 아님 |
루소(Rousseau)와 괴테(Goethe) 등을 거치며 자서전은 개인의 내면, 진정성, 독창성을 탐구하는 도구가 됩니다. 특히 괴테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본질적인 주제가 "외부의 사실"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경험된 현실(concretely experienced reality)임을 강조하며 '시(Poetry)와 진실(Truth)'을 연결했습니다.
루소(Rousseau), 괴테(Goethe), 밀(Mill)은 중요성 면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던 공식적 경력의 단계를 되짚는 일종의 이력서(cursus vitae)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진실이다. 기억의 행위(the act of memory)는 그것 자체를 위해 수행되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그것을 영원히 고정함으로써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속의 다소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동요를 충족시킨다.
(...)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서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삶이 지닌 통일성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떠맡는다. 이러한 태도와 행위의 '살아 있는 통일성(lived unity)'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건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우리를 규정하며, 언제나 우리를 제한한다. 그러나 외적 사실들의 복잡한 재료 위에 스스로를 관철시키는 본질적 주제들, 구조적 설계들은 바로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이와 같이 근대적 자서전 이해에서 삶의 통일성은 외부의 초월적 질서나 신의 섭리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성찰, 그리고 내러티브를 통해 개인 내부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자서전은 우연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전개된 삶을 사후적으로 되돌아보며, 흩어진 경험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엮어내는 실천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자서전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자아가 자신의 삶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고 그 연속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근대적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1-3. 근대로부터 탈근대로
자서전은 오랫동안 자아(self)를 드러내는 특권적 장르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 탈근대로 넘어오면서, 이 전제는 급격히 흔들리게 되는데요. 문제는 더 이상 "기억이 정확한가"가 아니라, 자서전이 과연 무엇을 만들어내는가에 있습니다.
현재 순간에만 국한된 의식에 대한 고찰은 나의 개인적 존재로부터 단지 단편적인 절단면(fragmentary cutting)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각적인 순간 속에서는 사물들의 동요가 보통 나를 지나치게 둘러싸고 있어, 그것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 기억(memory)은 나에게 일정한 거리[a certain remove]를 부여하고, 사안의 모든 내적·외적 연관성, 곧 그것의 시간적·공간적 맥락을 함께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항공 촬영이 지상에 있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나 성곽의 방향, 혹은 도시의 지도를 고고학자에게 드러내 주듯이, 나의 운명을 정신 속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은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주요한 윤곽선들, 그리고 내가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채로도 나의 가장 결정적인 선택들을 규정해 온, 내가 지닌 가장 깊은 가치들의 요구를 드러낸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즉,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의미의 복원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죠.
이 관점에서 자서전에서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따랐던 가치를 발견하고 흩어졌던 삶을 하나의 운명으로 재구성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고 봅니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서전적 이해를 '두 번째 읽기'라고 부르며, 오히려 이것이 첫 번째 경험보다 더 진실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경험은 즉각적이지만, 이해는 사후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 서사는 의식적인 것이며, 서술자의 의식이 서사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서술자에게는 그 의식이 자신의 삶 역시 이끌어 왔다는 점이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의식적 자각에 필수적인 성찰의 행위가 일종의 피할 수 없는 시각적 착시(optical illusion)에 의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그 순간의 무대 위로 되돌려 투사되는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자서전은, 형성 과정에 있는 것(that which is in the process of being formed)을 대신하여 이미 완결된 것(the completely formed)을 끊임없이 대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그러나 그의 논의는 '자서전에는 피할 수 없는 시각적 착시'가 개입하기 때문에 곧 자기 해체의 지점에 도달합니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찰과 통찰이, 마치 그 순간에도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속에 삽입되는 것처럼요. 그 결과 자서전은 언제나, 형성 중이던 삶을 이미 완성된 이야기로 대체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자서전은 진실에 접근하기보다는, 진실처럼 보이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장르가 됩니다.
이 난점은 극복할 수 없다. 아무리 천재성이 동원된 표현상의 기교라 하더라도, 서술자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결말을 언제나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막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는 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더구나, 서사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착시는 시작된다. 실제로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분명 여러 의미를 지녔거나, 어쩌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를 가정하는 행위는, 미리 설정된 이해 가능성의 요구에 따라 유지할 사실들과 강조할 세부 사항, 혹은 배제할 요소들의 선택을 지배한다. 기억의 실패, 공백, 왜곡은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다. 그것들은 순전히 물리적인 원인이나 우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하는 글쓰기 주체가 자신의 과거, 즉 사적인 현실에 대해 수정되고 교정된 이러저러한 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자서전 작가는 언제나 결말을 알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모든 것을 바꾸는데요. 자서전 속의 사건은 실제로 발생했을 때, 여러 의미를 가졌을 수도 있고 아무 의미도 없었을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하나의 의미를 전제(postulate) 합니다. 그리고 이 전제된 의미가,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어떤 실패와 공백을 남길지 어떤 왜곡을 정당화할지를 결정하죠. 중요한 점은 기억의 실패와 왜곡이 우연이나 생리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만들려는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탈근대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바르트와 푸코가 말한 '저자의 죽음' 이후, 자아는 더 이상 기원(origin)이 아니게 됩니다.
자아의 통일성은 삶에 원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쓰기(writing)의 결과물, 하나의 인공물(artifact)이 되는 건데요. 쉽게 말해, 자서전은 '내가 누구였는가'를 드러내는 텍스트가 아니라, '나는 나를 이렇게 이야기하겠다'는 창조 행위가 되는겁니다. 이 내용은 마지막 인용구를 통해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마 당신은 이 이야기 가운데 무엇이 얼마나 사실이고, 무엇이 얼마나 사실이 아닌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떤 통계적 분석을 통해 정확한 비율을 산출하고,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는지 가려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접근은 내 목적에 어긋난다. 내 목적은, 다른 많은 것들과 더불어, 소설과 회고록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숙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거짓말:은유적 회고록(Lying: A Metaphorical Memoir, 2000)>
탈근대적 관점에서, 회고록은 허구적 요소를 사용하고 소설은 자서전적 요소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죠. 중요한 것은 경계의 흐릿함 자체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진실 vs 허구, 자서전 vs 소설, 자아의 발견 vs 자아의 왜곡이라는 구분이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자서전은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아를 발명하는 글쓰기가 되기 때문이죠.
1-4. 자서전적 이해와 진실의 문제
탈근대적 내러티브 관점이 해방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자서전적 내러티브가 현실(reality)이나 진실(truth)과 전혀 무관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인간 이해를 위한 학문적으로 정당한 연구 방법이 될 수 있는지라는 문제가 제기되며, 이에 대한 대안적 틀이 필요하다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에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객관성과 측정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는 '거짓된 과학적 태도(false scientific attitude)'를 버릴 것을 제안하며, 내러티브 탐구는 수량화할 수 없는 인간 삶 전체의 복잡성과 모호함에 충실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적 사회과학보다 더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적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과학성'이란 측정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 삶 전체에 대한 충실성으로 재정의됩니다.
따라서 자서전의 중요성은 단순한 상식적 의미에서의 참과 거짓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탐색되어야 한다. 자서전은 분명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이며, 역사가에게는 그 증언을 검증하고 사실성을 확인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서전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기도 하며, 문학을 중시하는 독자는 그 문체적 조화와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게 된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자서전과 내러티브 연구는 사실의 정확성에만 충실한 진실관을 넘어 미학적 차원을 인식해야 하며, 연구자가 인간의 살아 있는 현실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예술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동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구스도르프의 논의는 여기서 한층 더 확장됩니다.
<무덤 너머의 회상록(Mémoires d’outre-tombe>이 오류와 누락,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이 <미국 여행기(Voyage en Amérique>의 대부분을 꾸며냈다는 사실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실제로 보지 못한 풍경들에 대한 기억과 여행자의 심리에 대한 묘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허구나 사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 예술적 가치는 분명히 실재한다. 거기에는 조작된 여정과 연대기 너머에서 확증되는 하나의 진실, 즉 한 인간의 진실이 있으며,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 그리고 독자와 자신의 매혹을 위해 비현실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한 천재의 몽상이 담겨 있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사실적 정확성이나 역사적 검증 가능성보다 중요한 것은 자서전이 한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고 형상화했는지를 드러내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기능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자서전은 객관적 기록보다 더 깊은 '인간의 진실(truth of the man)'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서전에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기능은 실증주의적 역사 비평이 강조해 온 객관적 기능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논문은 자서전과 내러티브 연구에서 진실은 단순히 재현되거나 임의로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형식을 통해 현재 속에서 자아가 자신을 의미 있게 형상화함으로써 드러나는 인간적이고 비이원론적 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내러티브를 단순한 '허구적 진실'로 이해하는 관점은 진실을 객관적 진실과 주관적 진실로 분리함으로써, 자서전적 이해를 다시 주체–객체 이분법에 가두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이에 대해 논문은 내러티브적 이해는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really happened)'가 오히려 자서전적 서술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단순 재현이 아닌 해석적이고 창조적인 재기술로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내러티브적 재기술은 고정된 진실이 아닌 '진실의 영역(region of truth)'을 형성하며, 인간 삶을 보다 포괄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진실 개념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러티브적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5. 내러티브 차원과 내러티브 탐구의 프로젝트
그러므로 자서전은 결코 한 개인의 삶을 완성된 이미지로 고정하거나 영원히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만들어지고, 행위하며, 되어가는 존재이다. 회고록(memoirs)은 존재를 넘어선 본질을 지향하며, 그것을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바로 그 본질을 창조한다.
- <자서전:이론적·비평적 에세이(Autobiography: Essays Theoretical and Critical)>
논문은 자서전적 이해(autobiographical understanding)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의 관점, 욕망, 관심에 의해 과거가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전제로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이 과거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기(self) 자체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자기 이해를 만들어낸다는 점이죠. 자서전을 쓰는 행위는 이미 정해진 자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통해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변증법적 과정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서전적 이해에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얽힌 변증법적 관계가 존재하죠. 과거를 해석하는 현재의 행위는 곧 미래의 자기(self-to-be) 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 됩니다.
자서전적 내러티브에는 이중의 포이에시스(double poiesis, 이중의 형성)가 작동합니다. 즉, 삶의 이질적인 사건들이 내러티브를 통해 종합되고 그 내러티브적 이미지에 따라 자기 자신이 다시 구성되고 재창조되죠. 이는 리쾨르(Ricoeur)가 말한 것처럼, 내러티브적 상상력이 삶의 파편들을 엮는 동시에 자기 정체성 자체를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내러티브적 차원은 단지 인지적, 미학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도덕적 차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를 해석하고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은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강한 질적 차이들(strong qualitative distinctions)'이라는 가치 판단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죠.
우리 삶을 최소한으로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선(the good)에 대한 지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에 대한 감각은 나의 삶을 전개되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방식 속에 엮여 들어가야 한다.
- <거짓말:은유적 회고록(Lying: A Metaphorical Memoir, 2000)>
자서전적 자기와 개인적 과거는 내러티브적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이것이 곧 허구나 거짓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상상(imagination)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말해지지 않았던 차원을 드러내는 행위이니까요. 옥타비오 파스(Paz)가 말하듯, 시적 경험은 외부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창조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자기(self)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끝없이 진행 중인 시적 프로젝트로 이해되죠.
그래서 자서전적 이해에는 여러 난점들이 따릅니다. 언어가 드러내는 동시에 왜곡한다는 점, 기억의 신뢰성이 믿을만한가, 타인의 감정을 고려했는가,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했는가와 같은 난점들이 대표적이죠. 이로 인해 자서전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형식화의 결과이며, 그 자체로 자기를 형성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개인의 ‘지식(knowledge)’이 머릿속을 벗어나 자신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나 동료, 정리해 둔 메모, 그리고 서가에 꽂힌 책들까지 포함하는 형태로 널리 퍼져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거나 ‘분산된(distributed)’ 것처럼 보인다.
- <자기만들기와 세상만들기(Self-making and world-making)>
자서전적 자아는 결코 고립된 '단일한 '나''가 아닙니다. 자아는 담화적 상호작용(이야기되는 상황, 청중,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자서전적 자아는 결코 고립된 '단일한 '나''가 아닙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의 역사, 심지어 우리의 선사(先史, prehistory)까지 몸에 담고 살아간다. 과거는 우리의 혈관을 흐른다. 자아란 이 진실을 살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성찰하게 해주는 도구이며, 그 성찰을 통해 관계에 대한 인식, 곧 의미로부터 위안을 얻도록 해준다.
- <나는 네게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기억의 땅에서의 체류(I could tell you stories: Sojourns in the land of memory)>
그래서 논문은 '내러티브적 무의식(narrative unconscious)'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흡수한 책, 영화, 미디어 등 2차적 경험들이 자서전적 이해에 깊이 관여함을 강조합니다. 자서전은 단순한 개인사 기술이 아니라, 개인을 구성한 다층적이고 관계적인 역사들을 식별하는 작업이죠.
이러한 기억은 시간적으로 큰 공백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의 빈곤으로 상쇄된다. 가장 ‘흥미로운(exciting)’ 사건들조차도 삶의 구체적 풍요로움으로 가득 찬 순간들(moments)이라기보다는 이정표들(milestones)로 기억된다.
- <변형(Metamorphosis)>
기억은 종종 살아 있는 경험을 진부한 클리셰로 대체합니다. 중요한 사건조차도 생생한 순간이 아니라 이정표처럼 요약되는 것이죠. 따라서 자서전과 내러티브 연구의 핵심 과제는 관습적 언어와 익숙한 내러티브 도식을 넘어서는 언어를 찾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뿐 아니라 내러티브 연구자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투쟁이죠.
그렇게 논문은 내러티브 연구가 단지 이론 생산을 넘어, '경험의 문학(literature of experience)'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과학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해를 드높이고 공감과 연민을 확장하기 위한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위치한 '시적 과학(poetic science)'을 지향하자는 제안이죠. 그렇게 내러티브 연구는 형식과 글쓰기 자체가 내용과 인간을 섬기도록 구성될 때, '인간 삶의 깊은 내용(deep human stuff)'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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