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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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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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포스터

1. 영화 자산어보 줄거리 (스포주의)

황서영 백서 사건에 연루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 잡혔다. 여기서 정약종은 사망하고,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가게 된다. 흑산도에 도착하고 정약전은 과부 가거댁의 집에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장창대라는 양반집 서자를 만나게 된다.

정약전은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책에 대해 논하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어류도감을 쓰기로 결심하고 창대에게 접근해 자신은 글을 가르칠 테니 창대에게 물고기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한다. 약간의 사건이 있은 후 창대는 그에게 글을 배우기로 하고, 대신 바닷생물에 대해서 가르쳐주기로 한다.

그러다 학식이 점점 뛰어나게 된 것을 창대의 아버지 장 진사가 듣고 청산도로 찾아와 그에게 벼슬길을 오르라고 회유한다. 그는 결혼한 복례와 아이들을 데리고 육지로 건너와 소과에 합격하는데 성공하지만 대과는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정약용의 <목민심서>대로 벼슬을 하고자 했던 창대는 삼정이 문란한 현 실태에 분노했지만, 다들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한 농민이 관아에 와서 군포를 내느니 남자임을 포기하겠다며 자신의 양물(자지)를 자르며, 부인은 그 앞에서 통곡하는 일이 벌어졌다(이 내용은 <애절양>을 모티브로 한 것 같다.). 이에 분노가 하늘을 찌른 창대는 아내를 끌어내리려는 아전의 목을 조르게 된다. 이 일로 그는 옥살이를 잠시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한다.

한편, 곧 유배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정약전은 육지와 가까운 우이도로 건너가 어류도감을 마저 집필하고 있었으나 건강이 악화되며 글을 쓰던 채로 죽었다.

가족과 함께 흑산도로 가던 도중 우이도에 들른 창대는 정약전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문을 하게 된다. 창대는 그가 남긴 어류도감, 자산어보,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들을 가지고 고향 흑산도로 돌아갔다. 흑산도로 가는 길에 복례가 '흑산도가 가장 살기 좋다'라고 하자, 창대는 그에게 '흑산도가 아니고 자산도'라고 답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2. 자산어보 서문

영화는 자산어보 서문을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이 영화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입니다.

-자산어보

그래서 자산어보 서문을 번역해봤다.

자산(茲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도)에서 유배를 하고 있는데, 흑산의 이름은 아득하고 어두워서 가히 두려워 집안 사람들은 글(편지)에 문득 자산이라고 칭했다. 자(玆) 또한 검다(黑)는 말이다. 자산 바다에는 어족(魚族)이 아주 풍성한데, 그러나 그 이름을 아는자가 드물다. 사물에 밝은 자라면 마땅히 살펴봐야 한다. 나는 이내 섬사람들을 두루 방문하여 족보(譜)를 완성코자 뜻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각각 다르게 불러, 가히 적절히 따를 수 없었다. 섬 안에는 장덕순(張德順) 창대(昌大)가 있었는데, (그는) 문을 닫아 막고, 손님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고서(古書)만을 좋아했으나, 생각건데 집은 가난하고 책은 적었음에도 손에서 책(卷)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견문은 능히 박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품은 차분하고 치밀해 무릇 초목과 새, 물고기를 듣거나 보면 모두 세세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그 성질과 이치(性理)를 얻었기에, 고로 그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나는 드디어 그를 맞이하여 집에 들여 함께 강구(講究)했고, 서문과 차례, 편명을 이름짓고,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하였다.

곁가지로 바닷새(海禽)과 해초를 아우렀으니 뒷세대 사람(後人)들의 고증과 경험에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생각건대 나는 완고하고 식견이 없어, 혹 이미 <본초(本草, 본초서)>에서 본 것도 있지만, 그 이름을 듣지 못한 것도 있다. 혹은 예로부터 그 이름이 없는 것도 있어 가히 고증할 수가 없었던 것도 태반이었다. 다만 세간에서 부르는(俗呼) 것에 의지해 읽을 수 없는 것들은 문득 감히 그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후세의 군자는 이를 바탕으로 닦고 윤을 낸다면, 이 책은 병을 치료하고 쓰임에 이롭게 하면 곧 많은 집들이 마땅히 그 자료를 응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 지성인)에게는 의지하는 바 미쳐 이르지 못한 곳까지 넓힐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칭할 수 있다.
가경(嘉慶, 1796~1820) 갑술(甲戌, 1814) 열수(洌水, 한강) 정전(丁銓, 정작전) 씀

 

3.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알쓸신잡

3-1. 별시와 증광시

별시(別試)는 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를 말하며, 여기에는 알성시, 춘당대시, 증광시 등이 포함된다. 그 중 증광시(增廣試)조선시대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식년시 이외에 실시된 비정기 과거를 말한다. 별시와 증광시 모두 '갑자기 열린다'는 점만 봤을 때, 현대의 '특별채용 공무원시험'과 비슷한 느낌의 시험이었다.

3-2. 서학

서학(西學)18세기 중국에서 도입된 한역 서양 학술서적과 서양 과학기술 문물을 말하며, 또한 이를 토대로 연구하던 학문을 말한다. 쉽게 말해 서양의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서적으로는 <천주성교실록>, <천주실의>, <만국여도> 등이 있다.

3-3. 황서영 백서 사건

1742년, 로마 교황청은 <조상 제사 금지령>을 발표했고, 이 사실은 1790년에 조선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여러 논쟁 끝에 1791년 윤지충 바오로가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뤘다가 친인척간의 다툼이 났고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사실이 조정의 귀에 들어가 고문 당하다가 죽은 신해 박해라고도 불린 진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천주교는 조선에서 반체제적인 종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런 상황 중 정약종이 쓴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는 글귀가 발견되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초기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죽거나 배교를 약속하고 귀양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약전인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황사영 토굴 (출처 : 두피디아)

그러나 사건이 터졌다. 정약용의 조카 사위이기도 했던 황사영이 지금의 충청도 지역의 한 굴에 숨어 청나라 가경제에게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는데, 여기서 '조선의 속국화, 조선왕의 부마(駙馬)화, 청군의 개입' 등과 같은 반란 내용이 적힌 것이 발각되면서 사망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게 된다.

참고로 1939년, 교황청은 <조상 제사 허용 훈령>을 발표해 조상 제사를 문화적 관점에서 볼 것을 인정했다.

3-4. 병조좌랑(兵曹佐郞)

품계 관직 정원
정2품 병조판서(兵曹判書) 1명
종2품 병조참판(兵曹參判) 1명
정3품 병조참의(兵曹參議) 1명
병조참지(兵曹參知) 1명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병조정랑(兵曹正郞) 4명
종5품    
정6품 병조좌랑(兵曹佐郞) 4명
종6품    

조선시대 병조(兵曹, 현 국방부급)에 둔 정6품 관직으로 정원은 4원이다. 병조정랑과 함께 실무를 보았다.

3-5. 별장(別將)

조선 초기에는 중앙군 조직인 십위(十衛)와 도부외(都府外)에 설치된 7품 무관직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 등의 군영에 설치된 종1품이나 정3품의 무관직 혹은 지방 산성, 섬 등의 방위를 맡았던 종9품 무관직을 뜻한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귀양왔을 때 당시 전라도 지역에는 흑산도, 고돌산, 위봉산성, 입암산성, 금성산성, 남고산성, 소안도에 총 7명의 별장이 있었다.

3-6. 사학죄인(邪學罪人)

조선시대에 박해로 체포된 천주교인을 지칭하는 말 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의 죄명(罪名)으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금했기 때문에 천주교인이 체포되면 국금(國禁)을 어긴 사학죄인의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3-7. 북경 성당(베이징 천주당)

북경 천주당(베이징 천주당)이라고 불린 천주교 예수회에서 청 베이징에 설치했던 4개의 천주당. 흔히 방위에 따라 동당, 서당, 남당, 북당으로 각각 불렸다. 원래 조선 천주교는 1660년부터 난징 교구에 속했지만, 점차 베이징 교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나 서학자, 일부 실학자들은 북경 성당과 주기적으로 교류해왔던 것이다.

3-8. <송정사의(松政私議)>

송정사의 내용 (출처 : 동아일보)

1804년에 정약전이 저술한 송금(松禁, 소나무 벌채 금지정책)이 잘못됐음을 설파하면서 지방관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소나무 식목을 권장해야 한다고 역설한 책. 소나무와 관련된 정책 및 행정(松政)을 사사로이 의논한다(私議)라는 뜻이다.

3-9. 문순득

1801년 12월,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표류해 류큐국(1429~1879)의 아마미오섬(大島)에 도착해서 풍족한 생활을 하다가 1802년 10월 중국행 조공선을 탔지만 또 표류되어 필리핀 도독부(Capitanía General de las Filipinas, 1565~1898)의 루손 섬(呂宋) 비간에서 생활하다가 1803년 8월, 청나라에 들어가고 난징과 베이징을 육로로 거쳐 1804년 12월에 조선에 도착했으며 1805년 1월에 고향 우이도로 돌아온 어물 장수. 그가 겪은 일을 정약전이 듣고 <표해록(漂海錄)>을 썼다.

3-10. 표해록(漂海錄)

1805년, 류큐 왕국, 에스파냐령 필리핀 도독부로 표류했다가 청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온 어물 장수 문순득이 말한 기행기를 정약전이 대필해 쓴 표해기행록. 이후 1818년 정약용의 제자였던 유암(柳菴)이 <표해록>에 대한 내용을 보완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지었다. 영화에서는 <표해시말>이라고 하지만 사실 정약전이 썼던 책의 정식 명칭은 <표해록>이었던 것이다.

3-11. <경세유표(經世遺表)>

1817년에 정약용이 저술한 행정기구의 개편을 비롯한 관제, 토지제도, 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정책서. 세상을(世) 다스려 이끄는(經) 유표(遺表)라는 뜻이며, 여기서 유표(遺表)란 신하가 죽을 때 임금에게 남기는 글이라는 뜻이다.

3-12.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년에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실학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牧民)에 대한 마음(心)만 가지고 쓴 책(書)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이 이 책을 쓸 때 유배 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목민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음(心)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3-13. <흠흠신서(欽欽新書)>

1822년에 정약용이 형사사건의 조사, 심리, 처형 과정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편찬한 법제서이자 형법서. 삼가고(欽) 또 삼가는 것(欽)으로서 새롭게(新) 형을 다스리는 책(書)이라는 뜻이다.

3-14.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 봉작(문관) 봉작(무관)
정2품
정헌대부
자헌대부
종2품

가정대부
가선대부
정3품
통정대부 절충장군
통훈대부 어모장군

조선시대 종2품의 하계(下階) 문무관의 당상관급 품계.


3-15. 공명첩(空名帖)

'이름이(名) 빈(空) 문서(帖)'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발행된 수취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백지 임명장이다. 주로 군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대가로 주어졌다.

4. 내가 뽑은 명대사

제일 먼저 영화 맨 처음에 정조가 정약전에게 했던 말이다. 자기가 긴히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천주쟁이'라고 불리던 서학자이자 실학자였던 정약전에게 주변의 공격과 험담에서 꼭 버티어 자신을 도우라는 말이었지만, 이 말은 현대에 와서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항상 말로 사람을 조정하는 부류가 있다. 상대가 이룬 업적에 대해 폄하하고 그 사람 자체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말로 자신의 편을 만들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업적을 세워나가는 사람을 뒤에서 욕하기도 한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무조건 폄하하고 무시하고 그런 사람들의 눈총과 무시를 버티어 자신이 원하는 뜻을 널리 펼치는 곳까지 오르라라는 조언처럼 들려 이제부터라도 자격증 공부를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

벼슬하는 선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아느냐?
버티는 것이야.
사방에서 칼이 들어오고 오물을 뒤집어써도 버텨 내는 것이야


두번째는 정약전과 장창대가 했던 대화다. 어떤 대상을 잘 알아야 그 대상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대상을 잘 알면, 그 대상에 대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돈을 얻고 싶으면, 돈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게임을 잘 하고 싶으면, 그 게임의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고, 생각날 때마다 특정 분야에 대해 조금씩 공부했지만, 이는 창대가 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창대는 물고기 하나를 정하고 그것만 계속 공부했다. 글로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겪으면서 경험했다. '큰 돌돔은 상어로만 낚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창대는 남들이 노력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도 끊임없이 물고기만 공부했다. 과연 나는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루 빨리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에 맞는 공부를 깊게 해야겠다. 우선 목표 찾기가 우선이다!

너는 물고기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오매 물고기를 알아야 물고기를 잡응깨요


세번째 또한 정약전이 동생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와 그가 창대와 했던 대화다. 주제가 비슷해 한 세트로 묶었다.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제자 창대를 칭찬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새로운 공부 목표를 찾았다고 밝혔다. 여기서 정약전은 몸과 마음이 매여있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배움을 추구하고 있다. 이 배움의 정신만큼은 정말 본받고 싶어졌다.

또 정약전이 어류 도감을 쓸 것이라고 하자 창대가 그런 것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려는지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정약전은 창대가 전에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반복하며, 배움과 지식 공유라는 중요한 가치를 회상시킨다. 인류가 지금까지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들 '문자의 발견'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 '문자의 발견'을 이뤄준 더 큰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배움과 지식에 대한 공유'다. 원시 시대부터 '사자는 위험하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남기며 사자를 피해왔고, 이러한 것들이 훗날 글이 되어 기록으로 남겨지자 많은 사람들은 사자에게 물리지 않아도 사자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에 대한 전파는 종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인류는 '동물에 대한 위협'을 배제하고, 다른 부분에 힘을 쓸 수 있었다. '동물에 대한 위협'과 같은 정보를 하나하나 저장하고, 그것들을 글과 말로 후세로 전달하면서 인류는 점차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제까지 성리학, 노자, 장자, 서학 가리지 않고 공부한 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이놈이 물고기에 대해 아는 것만큼도 알아낸 게 없지 않는가?
하여 이제부터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했네.
사물로 나를 잊어 볼 생각이네.
내 이제부터 물고기를 공부해보려고 한다.
물고기뿐만 아니고 김, 미역, 해초부터 꽃게, 새우, 홍미잘, 해충까지 싸그리 조사해서 어류 도감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그런 책은 만들어서 뭣 할라고라?

홍어 가는 길은 홍어가 안다 하지 않았느냐?




외울 줄 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어!
섬나라 왜놈들은 서양 배가 들어왔을 때 캐묻고 배워서 조총을 만들어 임진전부터 수년간 조선을 쑥대밭을 만들었어!

네번째는 창대가 사서에만 빠져 다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정약전이 그에게 건넨 조언이다.
좋은 것은 적극적으로 취하는 일본의 모방 문화를 인정하고 그러한 좋은 점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이야기였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조선과 중국은 일본이 섬나라이고 문화적으로도 뒤떨어져 있으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남쪽으로 건너온 남만인(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에게서 조총 기술 등을 배웠다. 결국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왕과 고위 관료들은 중국과 인접한 국경까지 후퇴하게 될 정도로 전력에서 큰 격차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결과가 어떠했냐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세상 물정 몰랐던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합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일본은 그냥 배웠다. 그리고 써먹었다. 그리고 얻었다.
정약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 아는 것은 글이 아니라 실천함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단 지식적인 측면을 조금 배워두고, 그 다음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몸소 익혀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나는 아직도 글로 세상을 배우고 있는데, 이제 이러한 생활을 슬슬 접고 세상으로 다시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몸쓰는 알바를 조금씩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을 경험으로 배우려는 정약전의 뜻을 이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몸소 익히고 배워 나와 가족과 나라에 큰 이익이 되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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