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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탑마트 초량점이 있던 곳엔 남선창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현재 부산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죠. 과연 어떤 곳일까요?
남선창고 터(Namsan old store) 초량동 393-1번지 |
1910년 부산상인 정치국(鄭致國)*을 중심으로 부산 최초로 1천여 평이 디는 해산물 보관창고를 세웠다. 처음엔 '회흥사(會興社)'로 불리다, 이후 북선창고(北鮮倉庫) 또는 명태고방(明太庫房)이라 불렀다. 이 창고는 1천평이나 되는 떡논 넓은 대지에 붉은 벽돌로 벽을 두르고 서까래와 기둥들은 나무를 써서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였다. 내부는 통칸으로 배수구 시설 등이 완벽하게 되어있고, 온도가 항상 일정해 바깥 기온과 무관했다. 함경도의 특산물인 명태를 비롯하여 해산물을 해상을 통하여 선박으로 부산항까지 운송해 와서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여 경상도와 충청도 등 각 지방으로 보급했다. 1914년 8월 경원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 가능 화물이 부산을 경유할 필요가 없게 되자 물주들은 원산으로 돌아가 그곳에 북선창고를 세웠다. 함경도에 돌아가지 않은 이병진, 오남근 등이 떠난 사람들의 주식을 양도받아 남선창고주식회사를 창립해 부산의 북선창고를 남선창고로 개명했다. 명태고방이 생긴 후 부터 해방직전까지 이 창고에는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명태를 시작으로 화공약품, 합판, 신발, 러시아 상인의 짐 등 부산경제의 흐름을 묵묵히 껴안고 있는 공간이었고, 은행과 주요 상거래에 그대로 통용되는 국내 최초의 창고증권을 발행한 곳이기도 했지만, 2009년 4월에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 붉은 적벽돌로 쌓은 담장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부산토박이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 |
*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는 정치국(丁致國)이라고 쓰고 있다. |
지금은 붉은 벽돌과 가운데의 기둥으로만 그 흔적이 남아 있네요.
남선창고 터 |
창고 안 천정은 삼각형의 목재틀로 만들어졌었고, 바닥은 창고라 습하면 곤란하여 간이수로가 있었으며, 슬라브 지붕빼고 옆벽면은 붉은 벽돌로 되어있었다. 2009년 4월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 붉은 적벽돌로 쌓은 담장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조갑상의 소설집 <테하차피의 달> 수록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 |
조갑상의 단편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는 작가가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인 남선창고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상실감에 작정하고 썼다'고 한다. 1930년대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 '조선인 오모니 살인사건(변마리아(변흥례) 살인사건)'이란 실화를 소재로 남선창고에 스며든 이들의 숨결까지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여주인의 불륜을 목격한 '죄' 때문에 살해당한 한 조선인 하녀의 혼령을 끌어들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털어 놓는 이야기다. |
1931년 봄 주인을 따라 부산 동구 초량동 철도국 관사 15호로 내려간 변흥례(1912-1931)는 그 해 한여름 안주인의 불륜을 목격한 것으로 사망했으나, 범인으로 추정되는 일본인들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인 변마리아 살인사건(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을 소재로 한 조갑상(1949-)의 <누군들 잊히지 못하는 곳이 없으랴(2009)>에서도 남선창고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곳에서 이 창고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겨져 있는 듯 합니다.
제 생각으로도 근대유산이 좀 더 올바른 모습으로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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