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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청 지하에서 만나는 조선의 창고와 인생문 문명석, 동래구청사 유적전시관

호기심꾸러기 2026. 1. 2.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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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0일에 새로 이전된 동래구청입니다. 이 동래구청 본관 지하 1층에 유적전시관이 있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본관의 계단을 통해 지하1층으로 내려가면 동래구청사 유적전시관이 있습니다.

영업시간 월-금 10:00-18:00
- 휴관일 : 매주 주말(토, 일), 법정 공휴일, 동래구청장이 지정한 휴관일
관람료 무료

19세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래읍성 인생문의 문명석(門名石, 문이름을 적은 돌)입니다.

1735년(영조 11),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지금의 칠산동에서 명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동래읍성 인화문(人和門)을 세웠는데요. 이 이름이 19세기쯤에 바뀌며 이 문명석이 지어진 것으로 봅니다. 원래 이 돌은 1970년대 인생문 근처 논둑 공사 중 발견되어 부산박물관에 기증되었다가 동래구에서 대여하여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동래읍성 인생문과 열녀 월성 박씨 정려비

1. 동래읍성 인생문유락여자중학교에서 동래중학교와 명륜초등학교를 지나 동래고등학교까지 이어져 충렬대로의 복잡함을 조금 덜어주는 동래로. 동래로에서 동래고까지 가지 않고 동래복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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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산의 모든 역사 기록을 담다, 부산박물관

1. 부산박물관부산 남구 대연동의 부산박물관입니다. 1977년 9월 30일에 부산시립박물관이 세워지고, 두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99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그 명맥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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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동래읍성 남문이 파괴되었다가 1731년 부사 정언섭이 남문 앞으로 거대한 방형의 중성(重城, 겹으로 된 성)을 돌출해서 쌓으면서 동래읍성 남문을 복구했습니다.

 

동래읍성의 문터들(동문터, 남문터, 서문터, 야문터)

날씨도 좋고 그래서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동래읍성의 여러 문이 있었던 자리 중 동문터, 남문터, 서문터, 야문터(암문터)를 찾아갔고, 그 탐방기를 쓴다. 일전에 동장대(https://mspproject2023.tistor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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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 복원된 동래읍성 남문 내문

내문은 '주작새가 관할하는 (남쪽의) 문'이라는 뜻의 주조문(朱鳥門)을 짓고, 그 위에 '근심을 없애는 누각'이란 뜻의 무우루(無憂樓)를 세웠습니다. 외문은 '무기를 닦는 문'이란 뜻의 세병문(洗兵門)이라고 짓고 단층 누각을 위에 세웠다고 하네요. 당시 동래읍성 성곽과 관아건물 정비를 위한 총 92774냥 중 37%인 20060냥을 투입할 정도로 남문 공사에 치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국에 걸쳐 유례가 없는 남문은 조선 유일 일본과의 국제도시였던 동래부의 위용을 과시함으로써 일본인들이 침략할 뜻을 품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축조되었죠. 그러나 1908년 일제에 의해 강제철거되어 도로로 변했습니다.

동래부사접왜사도

1387년 고려, 박위(朴葳), ?-1398)가 둘레 3090척, 높이 13척 규모의 동래읍성을 지었습니다. 이 읍성은 16세기 임진왜란 때 함락된 후 폐허로 방치되었죠. 그러다 1731년 부사 정언섭이 기존의 읍성 터를 포함해서 마안산과 망월산 능선까지 나아가는 둘레 17291척, 높이 17척 규모로 확대 개축했습니다. 이후 외침이 잦아지고 일본과 서계 문제로 외교관계가 악화되던 1871년에 부사 정현덕이 대대적으로 수축했죠. 성곽 밖에는 돌출한 30개의 치성과 그 위체 포루를 세우고, 남문을 비롯한 6개 성문에 각기 중성과 옹성을 쌓아서 방어력을 크게 보강했습니다. 그러나 1908년부터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서 도심지로 변했죠. 그나마 1980년부터 산 능선의 일부 구간과 북문, 인생문, 서장대, 북장대, 동장대를 복원해 읍성의 북부 지역의 흔적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동래구청사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유적 4개 문화층이 발굴됩니다. 그렇게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재)시공문화재연구원이 모두 일곱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를 실시했죠. 이 때 발굴된 유구는 후기 동래읍성 내 사창(社倉, 고을의 환곡을 관리하던 창고 건물) 유적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렇게 총 7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특히 2문화층에서 발굴된 건물지는 1731년(조선 영조 7년)에 쌓은 후기 동래읍성과 관련된 건물터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2문화층 1871년 관아 건물 정시 당시로 추정
3문화층 1731년 동래읍성 개축 당시로 추정
4문화층 임진왜란 직후-18세기 초의 관아 건물 복구 당시로 추정

건물터의 장축 방향은 동-서가 3기, 남-북이 4기이며, 평면은 -자형 ㄱ자형, ㅁ자형 등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3층의 1호 건물터는 잔존 규모만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마루 구조의 대형 건물로 추정되며, 그 밖에 2-10칸의 건물터 중에서 툇마루나 온돌을 갖춘 것도 확인되었다고 하네요.

여기서 발굴된 유구 중 이곳 동래구청사 유적전시관에 전시된 3문화층, 4문화층, 온돌, 우물, 화장실, 담장 등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는 당시 우물 모형과 화장실을 재현한 체험 공간도 있습니다.

이 발굴조사를 진행하며 건물터가 어디에 어떤 곳이 있었는지는 어떻게 유추했을까요?

건물터 자체는 18세기 동래부사 정언섭이 확대개축한 후기 동래읍성의 내부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8세기 중반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여지도>와 같은 지도들에서는 부창(府倉), 재창(財倉), 창(倉)과 같이 표기한 건물 1채가 그려져 있었고,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건물 3채가 ㄷ자형의 일곽을 이루는 모습으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동래부지(1740)>에는 객사 서쪽에 위치한 건물 중 5개 건물이 군집한 총 28칸의 사창을 묘사했는데, 발굴조사 결과와 일치함을 보려, 사창의 창고 건물과 좌기청, 대문 등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래시장 인근에 있었던 동래부 객사터

동래구 동래시장으로 들어가는 서편 출입로 오르막길 옆에 작은 표지석이 남아있습니다. 동래부 객사터 조선시대 때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배례(拜禮)를 올렸으며 중앙 관원들의 유숙(留宿)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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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화층과 4문화층에서 각각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우물이 발견되었고, 4문화층에서 대형옹기를 묻어 사용한 화장실이 발견됩니다.

특히 18세기를 중심으로 보이는 3문화층과 4문화층에서 발굴된 다양한 건물터의 흔적을 전시실 초입에서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토층전사(土層轉寫,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흙의 층위나 구조, 유물 덮개 등을 원래 상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특수 수지를 이용해 본떠서 다른 곳으로 옮겨 기록하고 전시하는 것)를 통해 이곳이 표토층(근현대/아스콘이 깔린 현재 지표와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구조물, 지지 말뚝, 할석(halite), 명갈색 사질점토로 구성), 1문화층(일제강점기/잡석과 기와편이 혼입, 건물지와 담장지 등 생활유적 조성), 2문화층(19세기/소형 할석, 기와편 및 조선후기 백자편이 일부 혼입), 3문화층(18세기 중후반/소형 할석과 기와편이 일부 혼입), 4문화층(18세기 전반/크고 작은 지정목(designated tree)을 박아 성토해 대지를 조성)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단 밑에 땅의 나쁜 기운을 누르고 땅의 신에게 공양하기 위해 묻는 진단구(鎭壇具, 제단으로 기운을 눌러 안정시키는 도구)의 복제품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진단구는 3문화층 1호 건물 터 내 2곳에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진단구는 땅을 파서 항아리를 일정한 곳에 묻고 몇가지 물품을 넣은 뒤 백자사발을 덮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3호건물터와 4호건물터는 조사대상지 남서쪽에 위치하며  온돌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 흔적도 볼 수 있죠.

이 유적지의 배수로는 3문화층 건물터에서 기와를 이용해 만든 배수로가 2기 확인됩니다. 하나는 수키와를 포개어 만드었고, 다른 하나는 암키와를 사용했죠. 석렬은 조사대상지 내 소곡부 주변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곡부를 정지해 평탄화한 후 상부에 조성되어 있는 면석이 곡부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물을 가두는 용도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또한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석렬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배수로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명확한 성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동래구청사 건립현장 유물 AR
봄바람의 희망(방명록)

전시실 중간에는 동래구청사 건립현장 유물 AR과 봄바람의 희망이라는 방명록도 있으니 체험해보고 싶으신 분은 QR로 접속해보세요~

그 뒤로는 좌기청과 서고를 재현한 파사드를 볼 수 있습니다.

좌기청(座起廳)
사창의 관원들이 곡물을 지키고 출납을 맡은 관원들이 상주하던 집무처. 1618년 동래부사 윤민일(尹民逸, 1564-1635)이 처음 6칸 규모로 지은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존속했다. 발굴조사 때 툇마루가 확인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4문화층 1호건물터가 좌기청으로 추정된다. 지하공간의 여건 상 완전한 규모의 복원은 불가능하므로 전통목조건축의 전면 4칸에 파사드(facade)를 재현에서 우측 1칸에 구성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적심간격 2400mm를 적용해서 주춧돌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일반적인 관아건물과 같이 홑처마의 소로수장집으로 꾸미고 창호는 소략한 4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서고(西庫)
1871년에 수리된 27칸의 대형 창고건물. 언제 처음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3문화층의 1호건물터로 비정된다. 이 건물은 18세기 중반 이후 곡물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창고와 별도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지하공간의 여건 상 전통목조건축의 좌측 1칸에 파사드(facade)를 재현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적심간격 2000mm를 적용해서 좌기청과 같은 소로수장집으로 꾸몄으며, 외벽은 창고건물의 특성을 살려서 판장벽을 설치했다.

<동래부지(1740)>에 따르면, 18세기 중반의 사창 일곽에 좌기청 6칸, 동고 14칸, 남고 6칸, 대문 1칸, 동중문 1칸 등 총 28칸의 5개 건물이 있었으며, 관원은 고직 1명, 하전 9명 등 10명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성역급각공해중수기(1871)>에 대문 1칸을 새로 짓고, 좌기청 6칸, 서고 27칸, 동일고 20칸 등을 수리했다고 하므로 기존 건물을 합치면 총 75칸의 7개 건물로 추정되죠.환곡을 운영할 곡물은 쌀, 벼, 콩, 팥, 겉보리, 메밀 등이었는데, 1871년의 경우 호조, 진휼청, 상평청, 균역청, 순영, 통영, 좌수영 등이 출자한 곡물 3678섬으로 동래부가 환곡 업무를 대행했다고 하는데요. 곡물의 절반은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절반은 창고에 보관하도록 했으며, 이자의 일부는 위의 기관들에 납부하고 일부는 동래부 자체 경비로 썼다고 합니다.

가운데에서는 사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퀴즈를 풀어볼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서 행렬을 만들어 화면에 띄워보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3문화층의 다양한 조선시대와 근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설치된 담장은 제3문화층 1호 건물 터 기단석에서 동쪽으로 약 2m가량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1호 우물과 인접한 1호 담장지를 근거로 합니다. 주축 방향은 남-북향으로 등고선과 직교하며, 남아 있는 규모는 길이 16m, 너비 50-120cm, 높이 55cm입니다. 담장을 쌓은 방법은 제3문화층 위면에서 50-60cm 돌을 이용해 대부분 세로눕혀쌓기를 했고, 남쪽 일부는 가로눕혀쌓기를 했습니다. 1단만 남은 담장의 면은 서쪽을 향해 있고, 1단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담장 터 남쪽으로 30-50cm 크기의 돌을 세로누혀쌓기한 1-2단이 연접하여 확인되는데, 이는 담장을 개수하고 보수한 흔적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이 담장 뒤에는 그 너머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조선 풍속 영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담은 일반적인 벽돌담과 영롱담[玲瓏담]이라는 중간에 벽도를 빼내어 보통 십자형 혹은 반달형 구멍이 나게 만든 벽돌담으로 구분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농민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양 옆으로 김준근의 <널뛰기>, 김홍도의 <우물가>와 <기와이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죠.

가운데에는 조선시대 농민의 경제와 관련된 환곡제(還穀制, 곡식을 빌려서 되갚는 제도)와 사창제((환곡을 저장하는) 마을 모임 창고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책을 넘기면 리더기가 코드를 인식해 화면에 출력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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