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 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의 근현대사를 세세히 묘사하다
1.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의 역사

1910년경, 지금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이 있는 곳에 조선은행 부산출장소 청사(1910'-1950.06.12.)가 들어섭니다.

이후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조선은행 부산지점은 한국은행 부산지점(1950.06.12.-2002.01.10.)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고, 같은 해 8월 22일, 이 부산지점 청사는 서울의 한국은행 본점이 잠시 차지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9월부터는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바꾸는 화폐교환조치를 시행했으며, 1953년 2월에는 긴급통화조치로 100원 당 1환으로 교환을 해줬습니다. 그러다 8월 8일 한국은행 부산지점의 중앙사무는 종결되어 본점이 서울로 올라가며, 다시 한국은행 부산지점의 영업이 시작됩니다.

이후 1963년 12월 28일,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 이천승이 설계한 이 한국은행 부산지점은 지상 6층에 지하 1층 규모(연면적 5250m2)의 신청사를 건립했고, 1971년에는 지하금고를 증축합니다. 시간이 흐른 1980년, 한국은행 울산지점이 개점하며, 한국은행 부산지점은 관할지역이 부산시, 김해군, 양산군, 밀양군으로 축소되어 경남권의 은행 업무의 효율을 높였죠. 1986년부터 1988년까지는 은행감독실, 기획조사과, 화폐정사과가 신설되었으며, 2000년 1월 10일에는 한국은행 부산본부(2000.01.10.-)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까지 그 명칭이 쓰이고 있습니다. 2003년 4월에 기획조사팀은 기획조사실로 확대 개편되었고,

2013년 7월 22일 한국은행 부산본부 신청사가 남구 문현동 문현금융단지로 이전하면서 중구 대청동의 (구)한국은행 부산본부 청사는 공실로 남게 됩니다.


이후 2013년 9월 25일에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고, 부산광역시의 다양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 2018년 상반기 박물관 조성 공사를 착공했고,

그렇게 2024년 1월 5일 부산근현대역사관이 개관하고, 이 건물은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으로 쓰이게 됩니다.
2.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


이곳은 광복절을 기념해서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2-1.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1층) - 카페, 아카이브실


건물 1층으로 들어가면 넓고 큰 카페 까사부사노(Casa Busano)가 있습니다.


현재 1층의 아카이브실은 원래 한국은행 부산본부의 금고로 쓰였던 곳인데, 한국은행 건물의 역사와 당시 자료를 보여주는 전시실로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조선은행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이 건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연표를 볼 수 있고, 한국은행이 지금까지 어떤 화폐들을 발행했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다양한 화폐들과 관련 문서들도 볼 수 있었으며,


한 마대에 만원권 약 3억원이 들어가며 플라스틱 파레트 위에 올려두고 관리한 한국은행 화폐 보관용 마대들과 만원권 그리고 오만원권 지폐 돈가루로 만든 의자 조형도 볼 수 있었습니다.
2-2.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지하1층) - 금고미술관


1963년 12월 한국은행 부산본부 건물을 재건축하면서 새로 지은 지하의 금고실은 2024년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 금고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다양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2-3.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2층) - 기획전시실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made in busan이라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심장같은 부산은 한국전쟁 이후 빠르게 산업기반을 재건하여, 동천을 중심으로 산업 발전의 씨앗이 움텄습니다. 그렇게 1960년대 부산은 한국 공업화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했고, 수출의 최전선에서 경제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 모습은 부산 1세대 상업광고 사진가 황성준 작가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가 30여 년간 촬영한 부산의 귀중한 기록사진을 제자 김진철 작가가 부산근현대역사관에 기증하면서 이번 전시가 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도가 1세대 공업 중심지였으나 1950년대 이후 동천 지역이 2세대 공업 중심지로 떠올랐고, 그렇게 좌천동, 범일동, 전포동, 부전도 , 연지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명목재상사(1949-1980), 락희화학공업사(1947-1974, (현) LG화학), 동양고무산업(1957-1989, (현) 화승) 등 굵직한 부산 기업들이 자리를 잡아갔고, 그들의 활약으로 1960년대 부산은 산업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1970년의 연지동의 럭키유지((현)LG), 1971년 용당동의 동명목재, 부암동의 진양화학, 당감동의 태화고무와 영도구의, 대한조선철공소((현) 케이조선), 1972년의 청학동의 부산조선, 1970년대의 수안동의 금북화학((현) 금양)의 모습도 볼 수 있고요.

1960년대 동삼동의 미창석유, 1968년의 사직동의 동양어망과 우암동의 조선선재의 모습과 당시 책자도 볼 수 있었습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96), 부산직할시 승격(1963), 경부고속도로 서울-부산 구간 개통(1970.07.07.), 부산항 1·2단계 개발 사업(1974-1982), 등을 통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부산의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하게 됩니다.


미화당백화점(1949-2001), 유나백화점(1981-1999), 부산백화점(1983-?), 태화백화점(1983.11.-?), 세원백화점(1991-2000), 신세화백화점(1992-1997) 등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향토백화점산업과 유통산업이 큰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백화점산업의 특성상 상업과 유통이 흥행되면 경제의 선순환이 되어 자연스레 부가산업의 발전도 이어지죠.
그러나 1995년 현대백화점과 롯대화점 등 대형 백화점의 진출과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향토백화점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지금은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 NC백화점 등 대형백화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부산백화점산업이 재편되어 지역 상권의 중심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부산은 1958년 최초로 공산품 수출을 이루어내면서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부산의 합판, 신발, 섬슈산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오랫동안 대한민국 산업게를 이끌어 왔죠. 경공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가려졌지만, 당시 부산은 중화학공업이 발전한 도시이기도 했죠. 그뿐 아니라 조선산업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made in Busan'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소비자와 해외 거래처에 제품을 소개할 광고용 카탈로그 제작에도 힘쓰게 됩니다. 그렇게 황성준 작가는 부산 산업의 현장에서 다양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죠.



1950년대 한국전쟁 복구와 재건의 수요를 바탕으로 부산에서 합판산업이 성장하게 됩니다. 처음엔 주한미군에게 납품하며 품질을 인정받은 경험으로 1958년에 국내 공산품 최초로 수출에 성공했죠.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단일 품목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며 대한민국의 수출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산의 동명목재는 용당부두에 대규모 목재가공단지를 건설했고, 세계 최대 합판기업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동명은 지금의 동명공업고등학교, 동명대학교, BNK부산은행을 남겼습니다. 그 외에도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향토기업 성창기업은 부산외국어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두 기업 모두 부산의 미래 인재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합니다.

부산은 섬유산업으로도 유명합니다. 피혁, 스웨터, 어망, 직물 등을 포함하는 섬유산업은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부산의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습니다. 1960년대는 합성섬유의 등장과 내수에서 수출로의 시장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는데, 이는 생산에 큰 활력소가 되어 부산 전체 수출액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기도 합니다. 일본인이 세웠고 당시 한국 최대 기업으로 군림한 조선방직(1917-1969)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 자리를 조선견직, 경남모직, 태광산업, 남양어망 등 많은 기업이 차지하면서 대한민국 섬유산업을 이끌었습니다.



송월타올(1949-), 부산방직(1949-), 조선견직(1949-?), 태광산업(1954-), 도남모방(1954-), 만호제강공업사(1959-1993, (현)만호제강), 경남모직(1956-), 조광무역(1964-), 삼해공업사(1964-?), 동화견직, 대흥공업사, 일신산업, 태일섬유공업, 유한방직 등 다양한 섬유산업기업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상황은 1960년대 부산이 거의 모든 공업생산품을 생산할 수 있는 종합공업도시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성장한 기업들은 국내 최초, 국산 개발 타이틀을 만들어내며 전국과 전세계로 뻗어나가며 산업의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부산은 중화학공업화에 동참하지 못한 채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특화되면서 경쟁력을 급속히 상실하게 됩니다.


이 당시의 유명한 기업으로는 금성사(1958-1995, (현)LG전자, LS일렉트릭), 대선주조(1930-), 대한비타민(1945.09.-1966, (현)대웅제약), 럭키유지(1959.10.-1966.01., (현)LG생활건강), 평화유지(1953.07.23.-), 광명페인트(1963-1979, (현)한진화학), 신진화학, 동일화학(1947.10.01.-2008.11.30.), 흥아공업(1951.06.-1992.03., (현)흥아), 동일화학공업소(1945-1954)-동일고무벨트공업사(1954-1966)-동일고무벨트(1966-), 삼우산업, 내쇼날푸라스틱(1965-) 등 다양한 기업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산업 기반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탄생한 철강산업은 당시 철못과 철선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철자재 제조회사들이 설립됩니다. 이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성업했던 철물업의 영향은 금속 철강산업의 급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대한제강, 동국제강, 극동철강, 고려제강, 부산철관 등 포항제철 건립 이전 부산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초기 대한민국 철강산업을 이끌어 갔죠.


철강산업만 성행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한반도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인 영도에서도 대한조선공사(1949-1990, (현)한진중공업)가 설립되어 1969년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하면서 made in Busan 물품들을 해외 수출하는데 큰 공을 세웠죠. 대선철공소(1945.12.-1963.04., (현)대선조선) 또한 강선건조업으로 조선해양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죠.

1970년대 원양어업의 붐이 일자 영도는 수리조선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 경제의 한 축의 역사는 지금 '깡깡이예술마을'로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조선기자재산업이 발달하여 현재 국내 조선산업을 지탱하고 있죠.


고무 원료가 들어오는 부산항, 풍부한 노동력과 수요를 기반으로 한국전쟁 이전부터 국내 신발산업이 성행했었죠. 동양, 삼화, 태화, 국제, 보생, 진양 등 내로라하는 굵직한 기업들이 부산 동천에 뿌리를 두고 성장했습니다.
1940-1950년대의 폐타이어 고무신에서 시작해 1960년대 이후 케미컬슈즈, 만화운동화 등을 만들면서도 OEM(주문자생산방식)으로 대외수출의 핵심역할로 자리 잡습니다. 이후 1970년대 대한민국 신발산업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며 부산은 세계 최대 신발 생산기지가 되었죠. 그 흐름은 1980년대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폭풍성장하다가 경영악화로 문을 닫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제 부산의 신발산업은 안전화, 골프화, 등산화, 특수기능화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며 미래로 달려갑니다.


사실 기업의 입장에서만 보면, 엄청 순탄하고 평탄하게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부산의 급성장의 주역은 바로 하루하루 출근하던 부산사람들입니다.


남성들은 주로 철강산업, 공산품산업, 조선업 등에서 일을 했고, 여공이라고 불렸던 여성들은 신발사업이나 방직사업 공장에서 일을 하며 부산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냅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금고에서 다양한 영상과 당시 사진 자료도 볼 수 있었습니다.
2-4.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3층) - 제1상설전시실



3층의 제1상설전시실 근대도시 부산관으로 갑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의해 부산항이 강제 개항됩니다. 1877년 1월 초 <부산구조계조약(釜山口租界條約, 1877)>이 체결되며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는 부산구조계(釜山口租界, 1877-?)가 초량왜관 자리에 들어오면서 개항장에 들어온 다양한 외국 세력들은 부산의 모습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죠.

1881년에 포산항(浦山港, 부산항)의 모습을 보고 취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포산항견취도(浦山港見取圖)를 통해 개항 직후 왜관 내무 상황을 잘 묘사했으며, 당시 포산항 인근의 자연 지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1883)>이 맺어지며, 외국인의 국내 통행 제한 조치가 해제되면서 외국인들은 조선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왔고, 서양인들은 그들이 체험한 부산과 조선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개항 직후 조선의 거류지로 들어온 이주 일본인들은 거의 일본 내에서 기반이 없던 중하위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개항지 주변에서 상업 활동을 했는데요. 아직 조선의 상황을 잘 몰랐기 때문에 주로 조선인 객주(客主, 일반적인 물류를 겸하는 숙박업소), 여각(旅閣, 항구 주변 물류를 겸하는 숙박업소), 보부상 등을 통해 내륙과 거래했죠.


당시 일본은 유럽 공산품(영국산 면제품 등)을 팔고, 조선은 식량(쌀, 콩)과 소가죽, 금 등을 팔았습니다. 그러다 한행리정(閒行里程, 사적 여행 거리)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인 상인들이 직접 조선사람들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 상인들도 자주적 근대화와 조직적 대응을 통해 일본의 상권 침탈에 대항하고자 했습니다.


| 남선창고의 역사 | |
| 1900-1910 | 회흥사(會興社) |
| 1910-1920 | 북어창고(北魚倉庫) |
| 1920-1926 | 북선창고(北鮮倉庫) |
| 1926-2009 | 남선창고(南鮮倉庫) |
부산 지역 최초의 근대적 창고인 남선창고(南鮮倉庫, 1926-2009)는 원래 해상을 통해 운송해 온 수산물 보관을 위해 지어진 초량의 명태고방(明太庫房)에서 출발했습니다. 1900년 초량객주 정치국은 함경도로부터 실어 온 해산물들을 부산에서 보관하기 위해 명태고방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함경도와 경성((현) 서울)을 잇는 철도가 없었기에 전국 판매를 위한 창고가 부산에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1914년 경원선 개통으로 함경도 수산물이 경성으로 직접 수송되기 시작했고, 결국 창고는 부산 지역 객주들만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26년 부산의 상인들은 창고의 이름을 남선창고주식회사로 변경했죠.


1877년 일본의 부산구조계를 시작으로, 1883년 역국과 독일의 조계가 영선현((현)영주동)에 정해졌고, 1884년 청국조계가 초량동에, 1892년에 러시아조계도 설치됩니다. 이후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외국인의 100리 이내 통행 제한 조치가 해제되며 외국인의 자유로운 통행이 시작됩니다. 이에 대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는데, 둘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죠.

제가 특히 눈여겨봤던 사건은 바로 1899년 7월 부산 지역의 고급 요릿집인 경판정(京阪亭)에서 러시아의 사관이 일본 기생을 폭행하는 사건인 경판정사건(1899.07.)입니다. 신문 보도로 시끄러웠던 이 소동은 해당 신문기사과 과장되었다는 일본 영사의 발표로 일단락되었죠.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저지하려던 일본 제국 간의 갈등이 단적으로 드러났던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무관세 제도의 문제를 인식한 조선 정부는 두모진해관(1878.09.28.-1878.12.26.)과 부산해관(1883.11.03.-1907.12.16.)을 설치하고, 1883년에 감리를 두고 이후 독립시킨 부산감리서(1890-1895, 1896-1906)를 두어 개항장의 일반 사무와 외구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등 노력을 하긴 했죠.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산46번지 일원에서 발견된 경부철도용지 표지석입니다.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수정산의 토지를 불하(拂下)받아 소유했던 흔적이죠. 1898년에서 1901년 사이 경부선 철도 예정지로 선정되어 표지석이 놓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고 비석만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표지석은 총 4개가 확인되었는데, 각 표지석의 상단에는 경부철도용지(京釜鐵道用地)라고 세로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일제강점기가 되어서도 부산의 식민지화를 목적으로 한 근대화를 꾀했죠.


진주에서 강제로 옮겨온 경상남도청 뿐 아니라 부산부청, 부산경찰서, 거류민단역소 등이 설치되었으며, 고원견수원지((현)구덕수원지), 구덕공설운동장((현)구덕운동장), 순치병원((현)부산부립병원), 조선시보사, 상업회의소, 저금관리소, 조선와전회사, 대정공원((현)부산광역시 서구청), 녹정유곽, 송도해수욕장, 경질도기회사((현)대한도기), 목지도배수지 등 다양한 일제의 계획에 의해 지어진 시설들이 들어섭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에서는 부산부제가 실시됩니다. 부산부는 1914년에는 초량, 부산진, 영도로, 1936년에는 서면과 송도로, 1942년에는 동래까지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부산부의 확대로 동래군은 축소되어 전통적 행정구역은 크게 변화되었죠. 특히 1925년 경상남도청의 부산 이전 이후 급격하게 인구가 증가했으며, 그에 따라 부산은 경성부((현)서울특별시) 다음의 대도시가 됩니다. 당시 일제의 농촌 수탈로 인한 농민들의 부산 유입도 인구 증가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부산의 근대적 사회기반시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확장됩니다. 경부선, 관부연락선, 전차, 영도대교 등의 교통 시설의 확장은 물류와 사람의 이동을 더욱 증가시켰습니다.


동래군의 축소는 일본의 새로운 영역 확장의 계획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의 동래부사는 지금의 부산광역시청급이었는데, 이제는 조선총독의 명을 받은 동래군수가 파견되었으며, 일제는 교통시설과 도로 구축을 위해 동래부 관아의 부속 건물들을 철거해버렸습니다.


동래의 상징이었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도 일본인이 만든 유원지 금강공원으로 이전시켜버렸죠... 동래 지역의 해체는 주민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이후 동래기영회를 필두로 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동래온천은 일본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발되었는데 온천수의 배탕권한은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용두산공원에 한 때 초량왜관이 있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했던 본정(本町)과 서정(西町)을 잇는 길이 나가테도오리(장수통, 長手通り)((현) 중구 광복로)이라고 불린 길이 있었죠.


이 길로 전등이 들어서고,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산업과 즐길거리가 등장합니다.

특히 1937년, 미나카이백화점(三中井百貨店) 부산지점이 5층 건물로 신축되면서 다양한 즐길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전쟁 확장을 하던 중이였기에 전쟁 선전을 하는 전시와 행사가 종종 열렸다고 하네요.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 야전군병원, 부산상공회의소 회관, 부산시청 별관 등으로 운영되다가 1998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엔 롯데백화점 광복점(2009.12.-)이 들어섰습니다.



근대적 소비생활과 근대적 상업시설이 정착하면서 '여행, 관광, 수학여행'도 시작됩니다. 일제는 식민체제 선전과 식민지의 억압적 현실을 숨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의 주요 명소를 관광지로 개발했는데, 특히 인기있던 곳은 한반도 각지의 온천들이었죠.



부산관광지도 뿐 아니라, 여관 광고지나 상표, 다양한 아내문과 여관열람들도 등장했죠.

근대 부산항의 역사는 대규모 매축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의 해안선은 산과 바로 맞닿아있고 바다에 인접한 대지도 좁아서 부두로서 기능을 하기엔 불리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은 한반도와 일본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일제는 패망 후 물러나기 전까지도 쭉 매축 사업을 진행하여 항구와 시가지를 조성했습니다.



부산 지역의 북항은 무역항과 군사항으로서 그 기능이 강화되었고, 남항은 어항과 수산업 기지로서 그 역할이 확대되었습니다. 부산의 항구는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거점이 되었으며, 슬프게도 한반도의 물자와 인력이 수탈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본이 부산에서 어떤 수탈을 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부산의 땅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조선 곡물은 부산 정미소와 항구를 거쳐 낮은 가격에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부산 지역 노동자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렸죠. 1930년대 이후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자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부산을 통해 유출됩니다.


일본이 침략 목적으로 근대화를 시켰다면 일제강점기 부산인들은 자주적으로 민족 실력을 양성하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죠. 그렇게 한국인 학생 수가 늘게되었고, 그 결과 일제의 경제 침탈 속에서도 부산의 실업가와 자본가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노력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렇게 구포은행, 백산상회와 백산무역주식회사 등이 등장하게 됩니다.


일제라는 수탈자에게 항쟁하기 위해 부산도 일어섰습니다. 1919년 3워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현)동래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이끈 부산 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은, 동래, 구포, 기장, 강서로 확산되어 학생들과 민중이 합세한 3.1만세운동의 물결이 펼쳐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1942년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부산진초등학교) 동창 5명과 함께 이광우(李光雨, 1925-2007)는 비밀단체를 조직해 일본 군수품을 제조하던 조선방직 파괴를 계획헀다가 경찰에 체포된 친우회 사건 등 부산 내에서 많은 독립운동도 있었죠.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성공시킨 의열단원 박재혁,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윤현진과 서영해, 만주에서 활양한 이봉우, 무장독립투쟁으로 유명한 박차정과 한형석,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안희제 등이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부산을 묘사한 종이표에 걸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 북장로교회(PCUSA)의 해외 선교사로 '사보담'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더 유명한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텀(Richard Henry Sidebotham, 1874-1908)이 그의 아내 에피 앨든 브라이스(Effie Alden Bryce, 1876~1942)과 아들 알프레드 브라이스(Alfred Bryce, 1900-1970), 딸 마가렛(Margaret)과 함께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당시 집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현한 공간도 멋있었습니다.
2-5. 부산근현대역사관 본관(4층) - 제2상설전시실


현대도시 부산관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합니다.


광복 직후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산하 치안대는 일본인이 떠난 행정 공백을 메우고, 질서 회복과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죠. 부산 지역의 각종 구호회는 귀국동포연합회로 통합되어 귀환 동포들의 임시 수용시설 제공, 교통편 알선 등의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부산에 중요 정부기구, 미대사관, 유엔 주요 기관 등이 모여들며 전쟁 극복을 위한 중심지가 됩니다. 특히 대부분의 물자와 원조, 구호품이 부산항으로 들어왔기에 이런 준비들을 빠르게 할 수 있었죠.

꽤 흥미로웠던 것은 부산세관에서 작성한 특공대밀수 검거보고서였습니다. 특공대밀수는 1950년대 중반에서 1969년까지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을 무대로 성행했는데, 소형 선박을 이용해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오가며 화장품, 카메라, 직물 등을 밀수했다고 합니다. 보고서에는 검거기록, 품목과 함께 밀수품 및 밀수업자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1953년 11월에 일어난 부산역전 대화재와 그와 관련된 물품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란 예술인들이 특히 광복동 일대 다방에서 모여 부산 르네상스(Busan Renaissance, 1945~1975)가 널리 펼쳐집니다. 이 부산 르네상스 시절 다양한 노래도 나왔지만 일본경질도기에서 유래한 대한도기의 핸드페인팅 도자기도 유명했죠.


스웨덴적십자병원(서전병원), 독일적십자병원(서독병원), 덴마크 유틀란디아병원선 등 부산에 자리잡은 의료지원국의 병원은 부상병 치료와 후송, 중환자 치료, 전재민과 극빈자 무료 진료, 의료 인력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합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은 더 나은 의료기술 수준을 갖게 되었죠. 특히 스웨덴과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국립의료원((현)국립중앙의료원) 설립에 참여함으로 현대적 의료 인프라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전후 부산은 인구증가와 원조물자의 도입항이라는 유리한 조건으로 공장들이 생겨나고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산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노력 끝에 부산은 산업화 시대를 이끄는 거대도시로 성장했죠. 그런 한편, 인구 과밀화에 따른 주택난, 교통 문제, 환경 오염 등 여러 사회 문제들도 나타납니다.


한국 전쟁의 원조를 통해 섬유, 제분, 제당 등 삼백사업이 발전했고, 제조업이 발달하며 부산은 재건을 통해 산업화가 시작됩니다. 특히 '여공'이라 불리는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부터 가정이 있는 중년 여성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저임금으로 산업 현장에서 일했던 여성들의 피와 땀도 산업화의 폭발적 증가의 주역 중 하나였습니다.


북항, 남항, 신항, 진해신항 등 부산권의 다양한 항구의 발전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도로스(matroos)는 국제 항로를 다니는 배의 선원으로 산업화 시대 해양도시 부산을 상징하는 직업이었습니다. 1957년 지남호 의 출항 이후 원양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마도로스는 상당한 수입을 보장하고 외국 문물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어 남성들이 선망하는 지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산항에 입항한 마도로스들이 주로 드나들던 남포동은 번화가이자 부산의 중심지로 성장했죠.


부산 남항은 자갈치시장과 공동어시장, 냉동냉장창고와 수산물 가공업체가 자리하고, 영도의 물양장과 수리조선소들이 밀집ㅎ란 지역으로 컨테이너 터미널과 더불어 부산의 해양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오면서 자갈치시장에는 생활력이 강한 자갈치 아지매가 등장했고, 산업화 시절에는 수리조선업과 원양어업이 크게 발달하며 깡깡이 아지매와 마도로스가 등장합니다. 전쟁사적으로 베트남 파병(1964.09.-1974.03.)도 이 부산항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때 베트남으로 떠난 한국군은 34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구가 증가한 동천 주변의 서면 지역은 서서히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그렇게 1957년 부산에처 최초로 회전식 로터리가 조성됩니다. 이후 1963년 부산직할시 긍격 기념 부산탑이 설치되어 그 아래로 전차가 지나갑니다. 그러다 1968년에 전차가 철거되었고, 도시철도 1호선 공사가 착공되며 1981년 부산탑과 회전식 로터리는 철거됩니다. 이후 1985년 도시철도 1호선 서면역이 개통되고, 1999년 도시철도 2호선 서면역이 개통되며 서면교차로는 교통의 중심지로 변하게 됩니다.



이승만 독재 정권과 부정선거에 항거한 4.19혁명(1960), 박정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부마민주항쟁(1979), 전두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6월 항쟁(1987) 등 부산에서도 있었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볼 수 있습니다.



<동백아가씨>, <울어라 열풍아> , <새벽길>, <성난독수리>를 포함한 100여 곡의 히트곡과 3200여 곡의 작품을 발표한 부산 출신의 대중음악작곡가인 거장 백영호(白映湖, 1920-2003)의 다양한 작품과 그가 썼던 옷과 악기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