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40년의 세월을 간직한 대구 천주교의 중심 보루, 계산주교좌대성당


대구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유일한 성당이자 범어대성당과 함께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대성당을 찾았습니다.



입구 바로 왼편의 작은 공원에 계산본당 초대 주임신부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1853.10.22.-1922.01.02.) 혹은 김보록(金保祿)의 흉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 약력 | |
| 1853.10.22. | 프랑스 제2제국 브장송(Besançon) 교구 오트손(Haute-Saône) 빌레쉴 솔로(Villers-sur-Saulnot)에서 출생 |
| 1876.09.01. | 빠리 외방선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대신학교 졸업 |
| 1876.12.23. | 사제 서품 |
| 1877.09.23. | 한국 입국(황해도 백천 파릉리) |
| 1878-1897 | 황해도 곡산, 함경도 안변 등지에서 전교 경기도 삭령 오리골에서 신학생 지도 |
| 1882-1885 | 경상도, 충청도 담당사제로 파견 |
| 1886.06. | 대구본당 주임사제로 임명 신나무골 정착. 경상도지역 순회 전교 |
| 1891.03. | 읍내 대어벌((현)인교동) 정규옥씨 사랑채에 정착. 임시성당 정함. |
| 1897 | (현)계산동으로 대구본당 이주 |
| 1899 | 한국식 십자형성당 건축 |
| 1902.02.03. | 대구대성당 완공 |
| 1919.09.09. | 주교관으로 은퇴 |
| 1922.01.02. | 선종(69세) |

| 우리 모두의 귀감 |
| 고국의 고향산천과 부모형제를 등지고 수만리 이국땅 대구에서 오직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김보록(Achille Paul Robert, 1853.10.22.-1922.01.02.) 신부에게 그가 신나무골에 정착한지 100년을 기념하는 오늘 계산동 본당 전신자가 그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흉상을 세우는 바이다. 세상의 부는 썩어 없어지고 영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만 복음의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에 그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김보록 신부의 모범이 교회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
| 1986.11.07. 대구대교구 계산동본당 설립 100주년기념준비위원회 |
그의 약력과 그의 노력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주위에는 작은 사진들과 함께 이 계산성당의 역사를 간략하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1885년 프랑스 출신의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1853.10.22.-1922.01.02.,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지방의 전교담당 사제로 임명되었고, 특히 대구읍내에서 전교를 하며 1000여명의 신자를 모아 한옥을 활용한 십자형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1898년 6월에 해성재 건물을, 같은 해 12월 25일에 성당을 준공하여 봉헌식을 진행했습니다.


이 해성재(海星齋)는 대구읍내에 등장한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으로, 신식교육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톨릭 신자 자제들 뿐 아니라 수많은 대구 학생들을 받으며 교육계몽을 펼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1908년 해성재는 통감부(1906-1910)의 <사립학교령>에 따라 성립학교(聖立學校, 1908-1916)로 교명을 바꿉니다.


1910년, 성립학교에 여자부를 같이 두었고, 그 여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Sœurs de Saint-Paul de Chartres, 1696-) 소속의 수녀들이 1912년 10월에 처음으로 대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게 낮에는 일반과목을 저녁에는 교회교육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또, 1915년에는 대구 최초의 브라스밴드(Brass band, 금관악기 중심의 취주악단)인 성립학교 악대부((후)해성학교 악대부)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렇게 이 학교는 효성초등학교(1996-)로 역사가 이어집니다.


1918년 5월 20일, 계산성당은 증축 곳아를 시작하여 같은해 10월 25일 준공하였는데, 성당 뒤편을 헐어서 증축된 새로운 성당의 종각은 두 배로 높아졌으며, 그렇게 현재의 계산성당의 모습으로 완성됩니다. 한 편 현재의 파고라 자리에 있던 (구)계산성당 사제관(1929-1994)은 1929년에 완공되었으나 1994년 화재로 철거됩니다.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와 군정기가 끝나고, 북한의 남침으로 1950년부터 남북은 한국전쟁을 겪게 됩니다. 이 때 유일하게 대구교구만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피난민과 대구시민은 종교와 상관없이 성모당과 계산성당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선 매일같이 '대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소서'라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습니다.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천주교 3대성당으로 꼽히는 이 계산성당에선 유명인사들의 결혼식도 많이 열렸다고 하는데요. 특히 1950년 12월 12일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도 열렸다고 합니다.


1984년 5월 3일부터 5월 7일까지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과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교환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교회를 찾았고, 특히 5월 5일에 이 대구 계산성당도 방문했다고 합니다.

| 대구 계산동성당 |
|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게하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


성당 입구로 들어가면 성호를 긋기 위한 성수가 담긴 성수대 있습니다. 그 왼편에는 한국 선교사로 선발된 P.H. 도리(P. H. Dorie), M. L. 위앵(M. L. Huin), B. L. 볼리외(B. L. Beaulieu) 등의 신부들이 출국 전 1864년 7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들은 7월 15일 파리를 떠나 홍콩과 상하이를 거쳐 11월에 요동의 좡허(庄河, 장하) 룽화산(蓉花山, 용화산) 아래의 차쿠(岔溝, 차구)에 도달합니다. 지금도 이곳엔 차쿠성당이 있죠. 어쨌든 그들은 1865년 5월 27일에 충청도 내포 지역에 상륙해 활동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하게 됩니다. 이들은 1968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에 시성됩니다.



안에 들어가니 감사하게도 성당을 안내해주시는 할아버지께서 사진도 찍어도 되고, 앞에까지 가봐도 된다고 하시면서 안내 책자를 주셨습니다. 계산성당의 내부는 길고 정결하고 고요했는데, 성스러운 느낌과 함께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899년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건립되면서 부속 건물로 지어진 계산성당 사제관은 30년이 지나면서 낡고 비좁은 건물이 되었습니다. 부임 초기부터 새 사제관 건립을 염원했던 계산성당 제2대 주임신부 요셉 베르모렐(Joseph Vermorel, 1860-1937)이 1929년 초에 자비로 사제관 공사를 착공하여 같은 해 7월 말에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안전과 조망상의 이유로 옛 사제관은 철거되었고, 2017년에 현재의 실물 미니어처 모형을 제작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성당의 남편에는 계산문화관과 계산본당회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계산본당회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대구경북권 최초의 개신교회 대구제일교회(1893-)도 보입니다.
[대구] 대구제일교회, 청라언덕에 세워진 대구 최초 크리스트교의 역사
대구 중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에 1989년에 기공하고 1994년에 준공해 지금까지 쓰이는 대구제일교회의 신본당입니다. 조선시대인 1896년부터 (구)본당((현) 대구제일교회 대구기독교역사관)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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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성모상이 있는 성모동산입니다. 둥글둥글한 느낌을 주는 성모상과 아기예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되었지만 대한제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대구 지역 가톨릭의 중심으로 지금까지 신앙의 중심지인 이 계산성당. 그 역사성과 더불어 종교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