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위안부'의 진실에 맞서 싸운 김문숙 여사의 인생, 어둠에서 빛으로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는 광복을 맞아 2025년 8월 13일부터 2025년 11월 29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부산여성인권의 시작, '위안부'할머니의 동반자 김문숙 특별기획전 <어둠에서 빛으로>가 열리고 있습니다.


'위로와 편안함을 주는 곳'이라는 근본적인 뜻을 가진 위안소(慰安所)는 1937년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이 일으킨 두 개의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부터는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여성을 중심으로 위안부를 뽑아 전쟁터로 보내 일본군의 성적 욕구 해소 대상으로 삼아버린 공식 윤락업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당시 40,000-200,000명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부(慰安婦)'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70%가 조선인, 그러니까 우리 한국인 여성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고 합니다...

이런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며 전시는 '김문숙'이라는 한 사업가의 인생으로 방문객을 이끕니다.


1927년 1월 12일에 태어난 김문숙은 고등 교육을 마치고 영천과 진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65년 부산에서 (주)아리랑관광여행사를 세우며 부산의 첫 여성 사장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기생관광(성매매관광)'이라는 성매매를 주 테마로 잡은 관광 상품이 일본을 중심으로 유행헀는데요. 이를 퇴치하는 운동을 하던 김문숙은 한 때, '정신대(일제강점기에 강제적으로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했던 단체)'로 잘못 알려졌던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부산여성의전화(1986-?) 사무실에서 정신대신고전화(1991.10.-?)를 설립해 '위안부'와 정신대에 속해 큰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을 돕고, 직접 찾아가 수기를 쓰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자료와 증언을 모은 김문숙은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대신해 직접 일본법에 따라 일본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다짐해 1992년 12월 25일, '위안부' 피해자 하순녀, 박두리 할머니와 여자근로정신대였던 유찬이, 박소득 할머니와 함께 야마구치지방재판소(山口地方裁判所) 시모노세키지부(下関支部)에서 <부산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시대공식사죄등청구소송(釜山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公式謝罪等請求訴訟)>을 제출하며 1995년 2월까지 8차에 걸친 구두변론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1992-)를 주도하거나, 중국 상하이 위안소(上海慰安所)를 방문하거나, 일본 후쿠오카에서 일본 정부 주도 민간기금에 대한 반대 가두시위(1995.04.23.)를 하는 등 다양한 위안부 관련 활동을 하고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정확한 물증이 아닌 증언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이 재판은 참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후쿠오카 변호사회 소속 재일교포 이박성(李博盛)을 중심으로 한 변호인단이나 전후 책임을 묻는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과 같은 150개의 시민단체와 수천 명의 개인들의 힘으로 재판은 계속 되어갑니다.


그 당시 활동 사진들도 함께 볼 수 있어 이 싸움에 얼마나 많은 힘과 시간이 들어갔는지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김문숙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여정을 숫자로 읽어볼 수 있는 공간을 지나게 됩니다.

| 포기하지 않고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자 했던 김문숙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여정 | |
| 11101km | 관부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복한 거리 |
| 68.5세 | 관부재판에 참여한 피해자들의 평균 나이 |
| 20차례 | 관부재판 과정 중 진행된 구두변론 횟수 |
| 1950일 | 1차 판결을 얻기까지 걸린 시간 |
| 4명에서 10명 | 관부재판을 진행하며 늘어난 원고의 수 일본군 '위안부' 3명, 여자근로정신대 7명 |


1992년 12월에 시작된 관부재판은 1998년 4월에 내려진 관부재판 1심의 판결문이라는 결과를 받게 됩니다. 여기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3인의 원고에 대한 위자료 각 30만 엔의 배상'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그들의 다른 청구사항과 여자정신근로대 7인 원고에 대한 청고는 전부 기각되었습니다. 그리고 3심까지 올라간 재판은 사실 확인만 인정했을 뿐 원고의 패소로 결정됩니다. 그럼에도 이 판결은 최초로 받아낸 일본 법원의 군 위안부 국가배상 인정 판결이라는 의의를 가집니다.

이 재판이후에도 김문숙은 2004년 9월 17일에 부산 수영구 수영동 수영역 부근에 민족과여성역사관을 세워 정식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은 일본 정부와의 투쟁을 이어가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교육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을 도왔는데, 그렇게 2021년 작고하실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2004년 8월 4일에 발급된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451-12에 (사)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법인설립 허가증,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평양대회(2005.09.19.-2005.09.24.) 참여 자료, 부산여성정치총연대(2005.01.27.-) 발대 총회 자료 등 관부재판 이후의 다양한 활동 기록들과 함께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마지막으로 갑니다. 저 멀리 그녀가 썼던 책상과 의자가 보입니다.



또 그녀가 사재를 털어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설립한 이후 유일하게 남긴 은반지를 포함하여, 그가 썼던 물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에 관한 짧은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고, 그녀를 기리는 편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김문숙의 차녀이자 이사장인 김주현씨, 고 김문숙 이사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함께 김문숙 이사장을 알게 된 한 관람객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아직 여성이 일어서기 힘들었던 대한민국 초기 거대한 사업을 성공시킨 한 여사는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된 역사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그 고통의 보상을 받게 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쳤습니다. 그런 김문숙 여사의 노력과 기록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고, 또 그 오랜세월 동안 어르신들의 고통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루 빨리 보상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