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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선사부터 조선까지 꽉 채웠다! 대구·경북의 선사부터 조선까지 거의 모든 것

호기심꾸러기 2025. 10. 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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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에 준공한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입니다. 행소(行素)는 계명대학교 초대 총장 신일희(申一熙, 1939-)의 아호(별칭)입니다.

이 행소박물관의 지하에는 카페사월이라는 카페가 있다고 합니다. 박물관 속 카페라니 낭만 있네요~

입구에 들어가면 거대한 토기가 방문객을 맞아줍니다. 상설전시관은 바로 앞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계명대학교 출신 장석호 암각화 연구가의 탁본 채록으로 공개된 천진리 암각화의 채색 모사도입니다.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다양한 암각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천진리 암각화의 채색 모사도
국보 제147호인 암각화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진리의 협곡지대 냇가에 위치한다. 위가 약 15도 정도 앞으로 튀어나온 비교적 판판 수직 바위면(세로 3m, 가로 10m)의 상반부에는 얕거나 깊게 쪼아 그린 선사시대의 기하학적 문약과 자연주의적 형상이 주로 배치되어 있고, 하반부에는 신라시대의 가는 선으로 표현한 그림(선각화(線刻畵)과 글씨가 배치되어 있다.

기하학적 문양에 원점문과 소용돌이문도 있지만 마름모꼴과 동심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문양들은 단독으로 그려져 있어가 가로 또는 세로로 반복해서 연결되어 있고, 특히 다른 문양의 모양들이 결합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롭고 풍요로운 느낌이 들게 한다. 이들은 기하학적 형상의 중심적인 도형이다. 또 형상문양에는 보관을 쓴 얼굴과 동물 및 나무가지 문양이 잘 나타나 있다.

선각화는 인물,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을 포함하는 행렬, 배, 말, 용, 숲, 나무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글씨는 개인의 이름과 간지 등 단편적인 것들이 여러 곳에 있으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의 내용은 신라사의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밖에도 명문을 조성할 때 하반부가 지워진 말과 상반신이 지워진 인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신라인의 복식상태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승지인 이곳에 선사시대로부터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우가되어 새겨진 이 암각화는 인접한 대곡리 암각화(본교 동산도서관 로비에 복제 설치)와 더불어 세계 선사미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사도는 암각화 연구가 장석호(계명대학교)가 암각 면에 투명폴리에틸렌을 이용하여 채록한 것으로, 기존의 탁본방법으로는 찾아낼 수 없었던 많은 형상과 기하학적 문양 및 선각화 등을 찾아내고 조각기법에 따라 색깔로 표현을 달리하여 암각화의 이해를 도왔다.

2층의 상설전시관에는 행소박물관 역사자료실과 구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는 제1전시실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는 제2전시실로 구성됩니다.

1. 제1전시실

1-1. 행소박물관 역사자료실

1977년 3월 계명대학교 박물관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김종철 박물관장이 취임하며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후, 1978년 5월 대명동 캠퍼스에서 박물관이 개관되었고, 1979년에는 보존처리실이 설치되었다가 1989년 5월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으로 박물관을 이전합니다. 이후 2004년 5월 성서캠퍼스로 이전하며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죠. 이후에는 일반대학박물관에서 개최하기 어려운 대영박물관전(2005), 중국국보전(2008), 중국근현대수묵화명가전(2010), 헝가리 합스부르크 왕가 보물전(2014) 등 국제전시를 여는 쾌거를 이룹니다!

 

1-2. 구석기시대(?~-8000년)

소규모 무리 이동 생활을 하며 사냥과 채집, 어로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한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처음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동굴, 바위그늘, 강가나 평지에서 임시적으로 지냈으며, 주먹도끼, 돌날자르개, 돌날긁개, 돌날새기개 등을 썼다고 합니다.

특히 대구 월성동 후기 구석시 시대 유적은 대구에서의 인간 거주 역사를 기원전 18000년~15000년까지 올려놓았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그 원산지가 백두산으로 추정되어서 놀라움을 드러냅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식 석기인 전곡리 주먹도끼로 인해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 교수가 주장했던 주먹도끼는 인도 서쪽지역에서 나오고 찍개류는 인도 동쪽지역에서만 나온다는 모비우스 이론이 와장창 깨져버리게 됩니다.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 일대, 경남 진주 내촌리의 남강 유역, 낙동강 유역(관화리와 취곡리), 섬진강과 보성강 유역에서 채집된 구석기시대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1-3. 신석기시대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는 약 10000년 전부터 한반도의 신석기가 시작됩니다. 이때부터 점차 '농경'이라는 식량 생산뿐 아니라 직물 생산, 토기 생산, 정착 생활이 자리 잡았죠. 그러자 묘지 설치(가덕도 장항유적의 토광묘, 진주 상촌리유적의 옹관묘, 울진 후포리유적의 세골장, 춘천 교동의 동굴화장 등), 대외교류(흑요석, 결합식 낚시도구, 결상이식 옥제귀걸이, 조몬 토기 등)도 나타납니다.

대구경북지역 내 동해안 지역 신석기 주요 유적 고성 문암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울진 죽변리 유적, 경주 대본리 유적, 경주 봉길리 유적, 경주 하서리 유적
대구경북지역 내 내륙 지역 신석기 주요 유적 김천 송죽리 유적, 김천 지좌리 유적, 대구 서변동 유적, 대구 달천리 135유적, 청도 오진리 유적

소백산맥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낙동강 중상류 일대에 해당하는 이 대구경북지역에는 동해안과 일부 내륙지역에서 조기 신석기문화와 전기 신석기문화가 확인되었으며, 이후 중기 신석기문화부터는 전 지역으로 유적이 분포되어 신석기문화의 확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김천시 송죽리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의 발굴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약 40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의 삶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복원한 마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석기시대 마을은 일반적으로 반정주성 형태의 소규모 마을이 점차 정주마을로 되다가 마을의 규모가 축소되어 가는 형태를 띱니다. 물론 이례적으로 파주 대능리 유적이나 서해안 도서지역을 통해 마을의 규모가 줄어들지 않는 형태도 볼 수 있죠.

송죽리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 깊은바리와 갈판과 갈돌 등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 토기의 흐름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빗살무늬토기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송죽리 유적에서는 석기제작장도 발굴되었습니다. 4000여 년 전의 그 모습을 재현해 뒀네요.

 

1-4. 청동기시대

기원전 1500년 전후에 시작된 청동기시대는 청동도구의 생산과 사용뿐 아니라 본격적인 정착농경 등을 토대로 한 사회분화가 진전되는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실용성을 위해 목제 농기구나 도구도 발달했으며, 그렇게 농촌마을이 출현합니다. 농경을 통한 축적된 잉여생산물에 따라 사회분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렇게 유력자가 비유력자가 생기는데, 유력자는 제사 등 의례적 권력을 통해 힘과 지위를 견고히 했죠. 그러면서 마을 자체로 짐승과 침입자를 막기 위한 큰 도랑이나 나무울타리를 지었고, 창고 같은 저장시설과 지석묘나 석관묘 등을 모은 집단묘지도 설치합니다. 대구 지역에는 서변동 유적, 월성동 유적, 동천동 유적, 대천동 유적, 상동 유적, 상인동 유적, 진청동 입석유적 등이 유명합니다.

돌대문토기,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등 다양한 청동기시대 토기가 송죽리유적에서 발굴됩니다. 특히 돌대문토기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시작을 알려주는 중요한 토기로서 지표가 되어 이 유적지에 신석기 유적과 청동기 유적이 함께 있음을 알 수 있죠. 다만, 공열문토기나 송국리식토기가 출토되지 않은 점을 통해 청동기 시대의 지역적 시대적 특성이 다름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토기의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반들거리게 문질러서 구운 붉은 간토기는 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등 무덤 내에서 주로 발견되며, 고운 흙으로 만들어졌고, 토기의 형태는 둥근 바닥의 긴목 단지 형태입니다. 이 붉은 간토기도 송죽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토기 뿐 아니라 송죽리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탄화된 상태로 발견된 개간과 기경 작업에 쓰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목제 괭이였습니다. 현 길이는 31cm이며, 가운데에서 한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한 곳에 직경 4cm 내외의 구멍이 뚫려 있어 이 구멍을 통해 자루를 연결한 것으로 보입니다.

낙동강 상류의 협곡평지에 위치한 안동 지례리 유적에서는 30여기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확인되었는데요. 이 내부에서 돌칼자루장식을 갖춘 돌칼과 자루가 달린 돌칼, 돌화살촉, 반달칼 등이 출토되었으며, 그 주변에서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구멍무늬토기, 덧띠토기 파편 등이 수습되었습니다.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는 주거지 유적으로 그 한편에 토기 조각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복원된 토기 중에서는 높이가 80cm나 되는 대형토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의외로 꽤 규모있는 거주지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1-5.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

1관의 마지막 전시실인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관입니다.

새로운 연화보유형, 세죽리유형의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전래되며 연화보 철제무기와 철제농공구등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한반도의 인류는 대략 기원전 400년 혹은 기원전 300년전부터 철기시대에 들어섭니다.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호서호남지역과 다르게 세형동검, 동모, 동부, 동과 ,간두령 등이 출토되는 반면 방울류와 다뉴경 등 거울류는 희소한 편으로 지역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철기시대와 관련되어 대구 연암산유적, 대구 팔달동유적, 대구 학정동유적, 대구 신천동유적, 달성 평촌리유적, 경주 황성동 유적 등이 유명합니다.

큰 범위에서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300년쯤까지 청동기의 소멸과 철기의 발달 및 보급이 이루어지는 원삼국시대가 펼쳐집니다.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 옥저, 동예, 부여 등이,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진한, 변한, 마한이 세력을 형성했죠. 이 식기에는 특히 토기에서 돌림판 사용과 굴가마의 등장으로 단단한 회색경질토기와 연한 회백색와질토기가 대략으로 제작됩니다. 대구지역에서는 팔달동 유적, 봉무동 유적, 평리동 유적, 비산동 유적, 만촌동 유적이, 경북지역에서는 경산 신대리 유적, 영천 어은동 유적, 경주 사라리 130호무덤 유적, 경주 덕천리 유적 등이 유명합니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늘고 널리 퍼지는 원삼국시대에 단야로(鍛冶爐, 금속을 불에 달구어 벼리는 화로)를 통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쇠도끼를 만드는 작업이 발전합니다.

당시 제련소에서 쓰였던 송풍관과 도가니 그리고 그 주변에 남아있던 쇠덩어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수준 높은 철제품 생산 기술을 보유한 경주 지역은 신라라는 대국으로 성장합니다.

널무덤인 창원 다호리 1호묘에서는 성운경(별구름거울, 星雲鏡)과 방울, 중국의 한나라부터 당나라 초기까지 쓰였던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방울은 중국의 핑딩단시(평정산시, 平顶山市)에서 출토된 동란령(銅鑾鈴)과 닮은 형태라서 중국과의 교류도 확인할 수 있죠. 그 외에 이곳엔 청동검, 쇠칼, 쇠도끼, 동전, 붓, 부채, 화살통, 검집, 삭도 등도 같이 묻혀 있었다고 합니다.

원삼국시대에 움집이 대부분이었지만 화덕이나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유행한 쪽구들 등의 난방시설이 있는 지상가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무덤은 독무덤과 널무덤이 크게 유행했으며, 시간이 지난 기원후 2세기부터는 덧널무덤으로 발전해 무덤의 대형화가 진행됩니다. 토기로는 앞서 말했듯 영남지역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와질토기가 많이 눈에 띕니다. 이런 와질토기는 그 모양에 따라 쇠뿔손잡이항아리, 화로모양토기, 굽다리 항아리, 굽받침 뚜껑항아리, 삿자리무늬항아리, 목 짧은 항아리 등 다양한 형태로 나옵니다.

용해로, 거푸집 폐기장, 화덕, 옹관 등과 주거지가 확인된 경주 서천변 황성동 마을은 제철(製鐵, 철광석 제련)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제강 과정과 단조 과정만 확인되어 철과석의 1차 처리과정인 제련 과정은 다른 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에 제철과정이 분화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계명기독대학 대명캠퍼스 본관 종

1956년, 계명기독대학(1956-1965) 대명캠퍼스 본관 종탑 건립 때 같이 설치된 계명기독대학의 종입니다.

이 종탑 위의 비사(飛獅, Flying Lion)는 계명대학교의 상징이죠. 용맹과 위엄을 떨치며 수호와 승리의 상징인 백수의 제왕 사자가 빛의 근원을 찾아 날아오르는 영혼의 몸짓을 표현한 날개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나라로 비상하는 계명인의 기상을 묘사했다고 합니다.

 

3. 제2전시실

3-1. 삼국시대

대가야와 성산가야 그리고 신라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삼국시대관입니다.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무장구와 마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복원한 약 1550년 전 대가야 지역의 기마병과 보병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사천 등을 포괄하던 대가야(혹은 반파국)의 영토였는데, 후기 기야연맹의 맹주로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479년에 하지왕은 남제로부터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이라는 명칭으로 책봉을 받으며 대중국과 교류를 했을 뿐 아니라, 481년에는 백제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입했고, 554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 공격을 시도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보여주었으나 562년에 멸망합니다. 이 대가야의 유적으로는 주산성, 미승산성, 소학산성, 전초팔성, 지산동 고분군, 연조리 추정 궁성 터 등이 있습니다.

5-6세기에 집중적으로 형성된 대가야 왕족과 유력자의 무덤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기, 금장식, 도치식 손잡이를 가지고 투공이 엇갈리게 뚫린 신라토기와 다른 부드러운 곡선과 안점감을 특징으로 하며 일렬의 투공을 가지는 대가야양식 토기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양한 고분군 중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호분에서는 정통 가야식의 판갑, 신라 황남대총 남분의 은관, 후쿠이현(福井県) 요시다군(吉田郡) 에이헤이지정(永平寺町)의 니혼마츠야마 고분(二本松山古墳)의 금동관이 발견되어 신라와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금동관, 뚜껑있는 목 긴 항아리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령에서 발굴된 굽다리접시, 뚜껑있는 접시, 손잡이잔입니다. 땅이 비옥해서 농사 짓기 좋았던 이곳에서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는데, 오곡(쌀, 조, 콩, 기장, 보리)과 복숭아 등의 과일이나 채소, 고둥, 생선, 닭도 먹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릇이나 음식 등을 봤을 때, 이 때에도 음식은 식용과 제사용으로 쓰였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고령 대가야와 성주 성산가야에서 출토된 기야지역 대형토기들입니다. 고분의 부장품이나 제사 유물로 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및 주변 고분군 분포 양상 (출처 : 계명대학교)

성산산성 주변에 위치한 성주 성산동 고분군과 주변 고분군을 합쳐 지표상으로만 500여기의 고분이 확인되는 성주 지역의 규모 있는 고분군입니다. 이곳의 무덤은 가야식 세장방형 석곽이 아니고, 대구 달성 고분군의 평면형 고분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다른 곳에 비해서 많이 출토되었지만, 철기류는 일부 마기류를 제외하면 빈약하다고 하네요.

성수 성산동 고분군에는 벼의 낟알이 묻은 굽다리 접시, 신선로모양토기, 긴목항아리, 굽이 달린 기목항아리, 손잡이 잔 등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요. 대가야식 토기가 출토된 주변의 차동골 고분과 다르게 여기서 출토된 토기들은 대부분 신라 양식이라 성주 지역이 일찍이 신라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영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수 성산동 고분군의 제59호분에서 출토된 신선로모양토기인데요. 주로 음식의 보온과 조리를 겸한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원삼국시대부터 쓰이다가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널리 발견됩니다.

 

나중에 가야의 대부분 지역을 병합한 신라는 급량, 사량, 본피, 모량, 한기, 습비의 6부족에서 출발해 수준 높은 철기문화와 소를 사용한 우경을 통한 농업 발전으로 일찍이 통합을 이루고 세력 확장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신라는 5세기가 지나고 6세기로 들어서며 점차 한반도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결국 7세기에 들어 당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합니다.

그런 역사를 가진 신라의 대형고분에서 금장식이 많이 출토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아실겁니다. 그래서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를 신라의 황금문화가 꽃피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이 황금문화는 동호계 유목민족 중 선비족의 삼연(三燕, 전연+후연+북연)의 황금 문화와 고구려의 황금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신라의 금제귀걸이(금귀걸이)와 은제허리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야 토기에 비해 직선적이면서 다양한 문양을 새긴 신라토기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토기에 토우를 붙여 장식하기도 하는데 신라라는 나라도 꽤 큰 나라인 만큼 지역마다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라 후기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장으로 꽃무늬를 찍어내는 인화문토기가 유행합니다.

 

3-2.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내어 676년 삼국 통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반도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했으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강화하고 지방통치조직과 군제를 개편하여 효과적인 통치를 꾀합니다. 문화적으로는 지역적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 문화와 백제 문화가 합쳐진 통일신라 문화가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중국, 일본 등과의 교류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국제적 문화의 형태도 나타나죠.

이러한 문화는 특히 왕성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월지, 구황동 원지, 용강동 원지와 다양한 사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불교가 발달한 만큼,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감은사지, 법광사지 등 다양한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건축 구조 중 하나는 바로 짐승얼굴무늬기와(도깨비무늬기와, 귀신무늬기와, 귀면와)입니다. 중국 서남쪽에 살았다는 전설 속의 괴수 도철(饕餮)의 모습을 그린 중국 은주시대의 도철문(饕餮文)과 남북조시대의 민간신앙 속 신의 모습을 묘사한 벽사(辟邪)등의 형태가 불교 등과 융합되어 건축물의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외에도 연꽃, 보상화, 덩굴, 가룡빈가, 두 마리의 새, 기린, 사자, 얼굴, 부처 등을 그린 전돌(건물이나 전탑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데 쓰던 벽돌)이나 수막새(수키와의 기왓등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 치미(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 등의 다양한 기와류가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납니다. 정말 아름답더군요.

손잡이 항아리, 도장무늬합, 철제 동물, 토제 소, 벼루, 토기, 그릇 표면에 꽃무늬를 찍은 도장무늬토기(인화문토기) 등 통일신라시대에 쓰였던 생활유물들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도장무늬토기에 찍힌 무늬는 당나라의 도자기와 금속용기 문양과 비슷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 기법은 후에 고려시대 상감청자와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영향으로 발전한 당의 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국제적이면서 독자적인 통일신라 조각양식을 탄생시킵니다. 초기에는 신체의 굴곡과 양감이 뚜렷한 세련되고 이상적인 형태를 띄다가, 점차 항마촉지인(마왕을 굴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증거로 지신에게 증명하며 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수인)의 형태의 앉은 형태의 불상이 유행합니다. 통일신라 후기로 갈수록 지방 호족의 성장과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양식의 불교조각이 확산되며 항마촉지인 불상, 약사불, 비로자나불의 형태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3-3. 고려시대

도자기, 토기, 금속유물을 중심으로 고려시대를 설명하는 고려시대관입니다.

고려시대로 들어서면서 화려한 귀족문화와 불교문화를 자 보여주는 공예문화가 발달합니다. 그 중 푸른자기인 청자(靑瓷)가 고려공예문화의 정수로 여겨지죠. 한반도의 청자는 중국 동한시대부터 남송시대까지 쓰였던 월주요(越州窯)의 청자에 영향을 받아 10세기 전반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11세기부터 녹청자(조질청자)가, 12세기부터 비색청자, 상형청자, 상감청자가 13세기부터는 동화청자, 금채청자 등이 등장했다가 14세기 후반 왜구의 약탈로 장인들이 전국적으로 흩어지며 청자의 전통을 이은 분청사기가 새롭게 나타납니다.

송나라의 서긍과 태평노인은 각각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과 <수중금(袖中錦)>에서 비취색을 띄는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비색청자는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까지 주로 만들어졌으며, 그 이후에 맑은 유악을 쓴 상감청자가 등장합니다.

삼국시대의 금은입사기법을 도자기에 응용한 세계 최초의 기법인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진 고려의 상감청자에는 구름, 학, 연못, 버드나무, 오리, 연꽃, 국화, 봉황 등 다양한 이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풍경과 불교적인 세상을 잘 담았다고 평가됩니다.

고려에서는 이런 청자, 청동기 뿐 아니라 일상생활속에서 쓰이던 도기(陶器, 질그릇)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려초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영향으로 인화문이 쓰였다가 점차 사라지며 회흑색, 회청색의 색조를 띄는 실용적인 질그릇이 나타납니다. 그러다 고려 중기에는 참회모양 주전자, 정병, 매병 등의 청자를 흉내 낸 질그릇이 고려 후기에는 표주박형의 병, 장군 등의 질그릇이 등장합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공예품인 불교의식구도 만들어졌습니다. 범종, 쇠북, 운판과 같은 범음구(소리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가르침을 전하는 불교의식구), 정병, 향로, 향완, 촛대, 번, 당과 같은 공양구(불단에 바치는 불교의식구), 사리 등을 담는 장엄구, 금강저, 금강령 등의 밀교법구(밀교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의식구) 등 다양한 불교의식구가 만들어졌죠.

그 외 일상적인 생활용품들도 이런 공예로 만들어집니다. 특히 나전칠기기술이 유명하죠.

한국과 중국의 옛날 돈의 변천사와 한반도 내 중국 화폐의 분포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한국의 화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중국 화폐를 쭉 쓰다가 고려 성종 15년(서기 996년)에 건원중보 배동국전이라는 철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통용되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17세기인 조선후기 숙종 때 상평통보가 공식 유통되며 그래도 200년간 조금씩 화폐가 유통됩니다.

한편 중국은 진나라 전까지 바다조개의 일종인 자패(紫貝)를 활용한 패화(貝貨, 조개돈)와 여러 종류의 금속화폐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후 진시황제의 진나라가 들어서며 반량전(半兩錢)이라는 통일화폐를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며 동양화폐사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이 반량전의 형태는 중국내 청나라 초기까지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화폐의 모양의 기준이 됩니다.

그렇게 중국, 고려, 조선의 다양한 화폐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습니다.

 

3-4. 조선시대

제2전시실의 마지막 전시관인 조선시대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까지 한반도의 역사에 비해 동전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 주역이 바로 주전소(鑄錢所)이죠. 다만 상설관청이 아니었기에 중앙 관련 부서나 지방 감영 및 병영 등에서 수시로 설치되고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전 뒷면에 어디서 주조되었는지 확인할 수도 있다네요. 이곳에서는 조선의 공식적인 유일한 법화(法貨, 법정화폐)로 동전(銅錢) 혹은 엽전(葉錢)이라고 불렸던 상평통보를 발행헀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경제적으로 느리지만 근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상평통보에는 여러 천자문이나 오행의 한 글자나 숫자와 부호 등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 외에도 종종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주로 장식용으로 쓰였던 별전(別錢)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기념주화도 발행되었습니다.

이 당시 특히 세종대부터 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은 인화기법으로 찍어내는 분장회청사기(粉裝灰靑沙器) 혹은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덤벙 기법의 분청사기, 철화 분청사기 등이 유행하가다 16세기 중엽 백자가 실용화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죠.

그렇게 순백자(純白磁)를 포함한 유교적 이상을 담은 부드러운 둥근 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백자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15세기부터 만들어진 백자는 유백색(15세기), 설백색(16세기), 회백색(17세기), 청백색(18-19세기)을 띄게 됩니다.

이 조선 백자의 결정은 청화백자(靑華白磁)로 나타나는데요. 그릇 표면에 푸른색 코발트 안료로 다양한 무늬와 그림을 그린 백자입니다. 

중국을 통해 15세기 중반에 들여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큰 인기를 누리다가 임진왜란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워진 17세기에는 산화철로 그림을 그린 철화백자가 유행하다가 다시 청화백자가 유행하며 19세기에 가서는 일상용품으로 쓰이게 됩니다.

조선의 일상생활유물도 빼놓을 순 없죠! 조족등(照足燈, 불빛이 발밑을 비추도록 만들어진 등), 등잔걸이, 벽걸이 등잔, 담뱃갑, 부시쌈지, 부시(부싯쇠), 솥, 놋화로, 손화로, 담뱃대 등 다양한 검소하고 친환경적인 생활용품들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벼루함과 벼루, 그리고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는 연적(硯滴), 책을 넣거나 얹어두는 서안(書案), 경전이나 책을 얹어놓고 읽는 경상(經床), 신분증인 호패(號牌), 관복띠 장식 그리고 나전필통과 대나무필통과 같은 사랑방(舍廊房, 기와집에서 남성이 지내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의 다양한 생활도구들도 볼 수 있습니다.

소반(小盤), 떡살(떡에 무늬를 찍는 판), 다식판(茶食板, 다식을 박아내는 판), 수저집, 주칠을 한 찬합(饌盒, 도시락통)과 대나무로 만든 찬합 등 보통 기와집에서 안방과 이어진 부엌이나 찬방(饌盒, 반찬을 만들 준비를 하는 방) 등에서 쓰는 생활용기도 전시되어 있죠.

여성의 규방문화가 꽃핀 안방에서 쓰던 조선후기의 거울, 비녀, 가락지, 바늘꽂이, 자, 인두와 인두판, 색실상자, 실패(실을 감아두는 도구), 바늘집, 버선과 버선본집 등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시대 장신구를 전시한 공간에서 다양한 장신구도 살펴볼 수 있죠.

다음으로 경북 김천시 교동 관아유적의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복원한 조선시대 김산군 관아(金山郡官衙)의 모습도 볼 수 있죠. 김천 김산향교와 연화지의 북쪽에 위치한 이 교동 관아유적에서는 객사(임금의 전패와 대궐의 궐패를 모셔두고 중요 손님을 숙박시키던 곳), 군기터(무기창고), 동헌(지방관의 근무지), 내아(內衙, 지방관의 거주처), 아전청(아전들의 근무지) 등이 확인되었고, 청자,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 도기, 기와 파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출토된 여러 도자기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외 십간과 십이지와 관련된 나침반, 해시계, 흥덕왕릉 뱀 탁본 등의 유물도 볼 수 있구요. 시험을 보러 대구에 온 김에 계명대학교 박물관을 가고 싶어져서 가봤습니다. 상설전시관이 한 층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알차고 다양한 구성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부산에만 있어서 부산 중심의 역사만 봐왔는데,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스토리텔링과 유물 전시는 저 스스로가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앞으로 다른 지역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 지역의 박물관도 둘러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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