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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근대역사갤러리 - 부산 초량의 과거와 현재: 백사청송의 해변에서 차이나타운까지

호기심꾸러기 2025. 7. 1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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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초량동의 초량근대역사갤러리를 찾았습니다. 초량 상해거리 안에 위치하기에 역사갤러리는 중국풍으로 꾸며졌습니다. 대한민국 부산의 역사에서 왜중국풍의 건물이 있냐고 하겠지만, 초량의 근대역사는 중국의 영향이 없진 않기 때문에 완전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중국 청나라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초량 상해거리 동화문과 상해문

부산 동구 초량동 상해거리의 북문인 동화문(東華門)입니다. 중국 청나라의 건축 양식으로 상해문의 보조문 역할을 하고 있죠. 이 문 뒤에는 '래래강녕(來來康寧)'이라 적힌 현판이 붙어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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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출처 : 카카오맵

내부의 모습입니다. 초량의 근대사를 사진과 설명과 함께 정리해뒀습니다.

1885년, 1890년대 중반, 1907년, 1908년의 초량 해안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육지가 된 부분이지만, 20세기 초까지만해도 초량은 해안마을이었습니다.

백사청송의 바닷가
초량바다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의 바닷가였으며, 고분과 무덤들이 있던 곳이었다. 중국 사람들의 점포를 겸한 주택이 형성되어 청관거리라 불리기 시작했다. 일본인 왜관거리에 빗대어 '시나마찌(중국마을, 支那町)'라고 불리기 시작하며 초량 길목의 터를 잡았다.

1910년 초량시장과 초량 청관거리, 초량 청관거리 앞 매축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부산 초량동 이대에 청국영사관과 청국조계지가 설치되었고, 화교들은 점표를 겸한 주택을 가지고, 주로 비단, 포목, 거울, 꽃신 등 중국에서 수입한 상품으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1910년 매축지 관련 사진, 1914년 부산진 매축공사(1차 등), 1920년 북항 매축지 관련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초량
일본은 거류지확장과 대륙진출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영선산(營繕山)을 차경(借景)하여 초량 앞바다를 매웠다. 시역의 확대에 따라 항만시설 축조, 교통망의 형성, 상하수도 시설의 건설 등 다양한 시가지와 사업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부산을 대륙침략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갖춘 근대도시로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1901년 경부선 기공식, 1910-20년 부산우편국 패스 모습, 1930년 영주고가교 아래 옛 조흥은행과 전차 모습, 부산역의 모습(1908년, 1930년, 1950년)도 볼 수 있습니다.

오른편으로 건너가면 발전하는 부산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부산항전경(1920년, 1930년, 1960년)과 초량의 모습(1910년, 1960년)을 담은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엄청 많이 바뀌었습니다.

1950년대 피난민촌, 1953년 초량배급소, 1960년대 주택 개량사업 전 초량 일대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고, 그 종착지는 부산이었다. 전시 상황에 기존 인구의 2배에 가까운 인구가 부산으로 몰려들었으며,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산비탈을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을 지었다.

현대 초량의 다양한 사업
1968년 초량에서 수정동 산복도로를 준공하였으며, 1969년 현위치에 부산역사를 신축하였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취로사업(就勞事業)을 실시하였으며, 1977년 초량천 복개 사업을 추진하였다.

마지막으로 이곳 상해거리의 2000년대 모습을 담은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화해온 초량의 모습은 단순한 도시 개발의 흔적을 넘어, 부산이 겪어온 역사와 시대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과거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 초량의 거리와 바닷가, 그리고 전쟁과 산업화의 파도를 지나 오늘날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이곳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흔적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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