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청산리 전투부터 자유시 참변까지, 북로군정서 출신 강근호를 모셨던 모정원

호기심꾸러기 2025. 2. 2. 13:03
728x90

애국지사 강근호길
강근호 애국지사
해운대구는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진충보국(盡忠報國)에 바친 강근호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2015년 3월 30일 대천공원에서 모정원까지 2km 구간을 '애국지사 강근호 길 명예도로'로 지정하였다.

해운대구 장산 '애국지사 강근호길' 표지판에서 약 11분을 걸어 올라가면 '자식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을 생각나게 하는 동산'이라는 뜻의 '모정원(母情菀)'이 나옵니다.

1960년 남편 강근호를 잃은 대한민국 국군 출신 이정희(1932-2016)는 1963년부터 어린 남매를 데리고 해운대 장산으로 들어와 장산개척단장(1963-1970)으로서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갈밭을 개간하여 푸른 농토를 만드는데 헌신했죠. 그 개간한 곳 중 하나가 바로 '모정원'입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매일 뜰을 가꾸고 지키며 찾아오는 방문객에게 애국혼을 불어 넣어주며 만년을 보넀죠.

'만주벌의 강근호와 장산의 이정희'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여기에 강근호와 이정희의 이야기를 간단히 볼 수 있었습니다.

2003년 7월 17일에 군수사령부 장병 일동이 세운 큰 글씨의 '애국지사 강근호님의 집' 안내판으로 이곳이 모정원임을 알 수 있죠.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추모비
(현충시설 안내)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22(2003.9.)
관리자 :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유족
강근호(姜槿虎/이명 강화린(姜華麟), 1898-1960) 지사(志士)함남 정평 출신으로 1916년 학생소요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1만세운동 직후 무장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1.06-1920.07.)를 졸업하고, 1920년 6월 이장녕(李章寧, 1881-1932) 참모장과 함께 북로군정서(1919.10-1920.12)에 부임하여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역(靑山里戰役, 청산리 전투, 1920.10.)에서는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제1중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중대원을 지휘하여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흑하사변(자유시 참변),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교관, 1926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 독립운동 등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다가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

1947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9년 2월 52세의 나이로 육사(8기, 특별4차)에 입교, 장교(군번 13193)가 되어 건군과 6·25를 거쳐 1956년 5월 제103사단 제118연대장(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60년 2월 영도 영선동에서 63세로 작고한 선생의 유해(遺骸)는 1964년 이곳 장산으로 모셔왔다가 1990년 12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건국포장(제955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103호)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 4월 육군 제53사단 장병일동은 선생의 유택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이름도 없이 사라졌던 선생의 애국혼은 2002년에 전기(傳記)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이 출판되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추모비는 2003년 9월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진충보국에 받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4월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사이 길로 내려가면~

애국지사 강근호님의 집이 나옵니다.

추모비 양옆에는 강근호 선생과 이정희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집의 중심은 강근호기념관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다음에 들어가 볼 수 있다면 후기를 남길게요~

비석 정면 기준 왼편
비석 정면
1960년 영도구 영선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신 후 애국지사 고  강근호
미망인   이정희 여사님의 가
1963년 장산 이 자리에 이장되시고 고 강근호 지사님은 만주 3·1운동, 청산리 전투, 시베리아 자유시 전투 등의 선봉에서 광복조국을 기약하며 항일투쟁의 깃발을 드높이셨습니다. 광복 후에는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육사에 입교, 연대장으로 전역하시기까지 6·25동란 등에서 불꽃같은 투혼으로 혁혁한 무공을 남기시었으며, 미망인 이정희 여사님 또한 6·25동란시 고귀한 희생정신으로 여군에 자원 입대하여 많은 공훈을 남기셨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우리 진충부대(제53보병사단) 전우들에게 살아숨쉬는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었기에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1990년
12월 7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음 2000.4.13.
제53보병사단 장병 일동

이 뒤에는 '애국지사 강근호의 묘'가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1990년 12월 7일 대전국립묘지(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어 있으며 이곳은 묘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6년 10월 21일 돌아가신 그의 부인 이정희 여사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남편과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