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의 인물 정리
지속적으로 업로드 될 예정.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찾기를 통해 검색하면 됨. 다만 키르기스식 이름을 다 적고 있으며 마지막에 러시아식 이름도 적었기에, 이름이나 성만 검색하는 방식으로 찾는 것을 추천함(예를 들어 ' 친기스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를 찾고 싶다면 '친기스'' 혹은 '아이트마토프'로 검색하는 방식) |
아라바이 우울루 에셰나알릐(Арабай уулу Эшенаалы, 1882~1993.06)
키르기스스탄의 교육자이자 공인. 집안 형편이 어려워 12살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후에 튀르키예로 유학 가서 종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우파(Уфа)로 가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시인 몰도 킈릐치(Молдо Кылыч)의 시집 <킈사-이-질잘라(Кысса-и-Зилзала)>를 편찬한다. 이후 27세에 갈리야(Галия)에서 졸업하고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와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1911년 그는 우파의 한 출판사 <샤르크(Шарк)>에서 <키르기스(Киргиз)>라는 가명으로 키르기스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출판된 최초의 교육서적, 교과서 등을 포함한 다양한 카자흐어 출판물을 펴낸다. 이후 1924년, 키르기스 학교 최초의 교과서인 <키르기스 알파벳(Кыргыз алиппеси)>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최초의 키르기스어 신문인 <에르킨-투(Эркин-Тоо)>의 편집자이면서 서사시 <마나스(Манас)>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부서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세메테이(Семетей)>라는 시를 녹음하고 출판하기도 하여 교육 뿐 아니라 민족적인 위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사회투란당(Социал-Туранская партия) 사건으로 잡혀갔고, 감옥에서 재판 받기 전에 사망하고 만다. 그의 이름은 이후 1992년 당시 В. В. 키르기스 마야콥스키 여성 교육대학교(Киргизский женский педаг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имени В. В. Маяковского)의 이름을 개칭한 'И. 아라바예프 키르기스 국립대학교(Кыргыз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имени И. Арабаева)'으로 남아 아직까지 기려지고 있다. 러시아어로는 아라바예프 이셰날릐(Арабаев Ишеналы)라고 한다.
칭기스 퇴뢰쿨 우울루 아이마토프(Чыңгыз Төрөкул уулу Айтматов, 1928.12~2008.06)
소련과 키르기스스탄의 작가. 어린 시절엔 당대 다른 키르기스인들처럼 유목생활을 했다. 1840년경부터 마을의 서기보로 일하다가, 학교에 다니며 공부에 임했다. 1946년에는 프룬제(현 비슈케크)의 키르기스스탄 농업대학 축산학부에 입학해 축산기사가 되어 일하다 문학에 관심이 생겨 문학연구를 하다 1958년부터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Правда)> 편집국에 들어가 그곳에서 여러 작품을 발표한다. 그는 신화와 전설, 민화 등을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로 많이 썼는데, 이 작품들은 전세계 174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책의 총 발행 부수는 8천만 부라고 한다. 1980년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문학자 입장에서 개혁을 호소하기도 했다. <자밀라(Джамиля, Жамийла, 1958)>, <붉은 머리스카프를 두른 나의 포플러(Тополёк мой в красной косынке, 1961)>, <빨간 사과(красное яблоко, 1964)>, <이른 두루미(ранние журавли, Эрте келген турналар, 1975)>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러시아어로는 친기스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Чингиз ТорекуловичАйтматов)라고 한다.
사디르 누르고조 우울루 자파로프(Садыр Нургожо уулу Жапаров, 1968.12~)
키르기스스탄의 정치가이자, 정당 메켄칠(Мекенчил) 소속으로, 제6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다. 농부 출신으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솔툰쿨(Солтонкул) 농업장으로 있으며, 정치의 길을 차례로 밟기 시작한다. 2012년 현지 금광 중 하나를 국유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수도 비슈케크 중심에서 집회를 이끌다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며, 2013년에는 이식쿨주 카라콜에서 정부 전권대표를 잡으려다 차 한 대가 불에 붙자 실패를 예감하고 국외로 빠져나간다. 이후 폴란드에서 4년간 있었는데 거기서도 금광과 이동통신사 메가콤은 국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온 즉시 에밀벡 캅타가예프(Эмилбек Каптагаев)를 인질로 잡은 혐의로 징역형을 받게 된다. 이후 풀려나, 2020년 10월 10일부터 2021년 1월 21일까지는 2021년 1월 28일부터 제25대 국무총리를 맡았으며, 이후 제6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 취임 후 그는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키르기스공화국 국방부를 재건할 것을 명령했으며, 금광에 대한 간섭을 시작한다. 국외로는 친러시아적 성향이 보이면서도 러우전쟁에선 중립을 주장했으며, 카자흐스탄과 협력해 키르기스스탄의 에너지 안보를 보장받기도 했다. 타지키스탄과의 국경 분쟁을 줄이려 노력했고, 투르크메니스탄에 천연가스와 전기 공급 등에 간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어로는 사디르 누르고조예비치 자파로프(Садыр Нургожоевич Жапаров)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