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후예, 키르기스스탄의 부구족
1. 부구족이란?
부구(бугу)는 키르기스스탄어로 사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사슴족'이란 뜻이죠.
이들은 오투즈-우울(Отуз-уул) 중 우익(右翼, Оң канат)에 속하는 대규모 키르기스계 부족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우익이란 단순히 오투즈-우울 민족 중 '오른쪽 날개' 계열이란 뜻이지, 현대의 정치적 스펙트럼과는 무관합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오로즈박의 아들 아릭-믜르자와 까라-믜르자가 어린 사슴을 쫓다가 그것을 절벽 가장자리로 몰아 넣었습니다. 이 때 이 사슴이 소녀로 변합니다. 이 소녀는 두 형제의 동생 믜르자꿀-믜르자의 아들 알렉시트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슴이었던 여인인 사슴엄마(мать-олениха)와 결혼한 알세이트의 후예가 부구족의 정통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2. 부구족의 계보도
이들은 키르기스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타가이-비(Тагай-бий)의 아들인 끨즤르(킬지르, Кылжыр)의 아들인 오로즈박(Орозбак)의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오로즈박에겐 믜르자-아릑(아릭-믜르자, 미르자-아릭, Мырза-Арык), 아싼-믜르자(아산-미르자, Асан-мырза), 까라-믜르자(카라-미르자, Кара-мырза), 믜르자꿀-믜르자(미르자쿨-미르자, Мырзакул-мырза), 토코치-믜르자(토코치-미르자, Токоч-мырза)의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 중 믜르자꿀-믜르자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창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두 아들 알세이트(Алсеит)와 띄늼세이트(티님세이트, Тынымсеит)의 후손들이 지금의 부구족 대부분을 낳았다고 하네요. 물론 다른 아들들도 부구족의 후예라고 여겨지지만, 학자에 따라 믜르자-아릑의 후손은 부구족의 한 계파인 아릑족(Арык)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3. 역사적 및 유전학적 관점에서의 부구족
부구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종족입니다. 이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있죠.
Б. Р. 조릭투예프(Б. Р. Зориктуев), Т. А. 아케로프(Т. А. Акеров) 등 일부 역사가들은 오르콘-철륵(오르콘 유역에 살던 철륵)의 푸구족(Пугу)과 동일시하기도 하죠. 한편, 역사학자 Т. А. 아케로프에 따르면, 카라한 칸국(840~1212)을 세운 치길족(чигиль)이 부구족과 동일한 종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키르기스의 부구족은 튀르크계 이슬람 중앙아시아 국가의 모태를 구성한 종족이 되겠죠! 철륵과 돌궐족(괵튀르크족) 등을 묘사한 중국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Б. Р. 조릭투예프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푸구족은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 공동체라고 합니다.
Г. Н. 루먄체프(Г. Н. Румянцев) 등을 포함한 다른 연구자들은 푸구족이 3세기에 동아시아에서 활동안 고대 튀르크족 고거(高車, гаогюй)를 구성하는 고대 몽골인 중 하나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철륵, 고거(고차, 정령), 회흘(回吃, хойху)에 속했던 여러 부족이 고대 몽골인에 속한다는 주장은 Н. Я. 비추린(Н. Я. Бичурин)과 А. С. 샤발로프(А. С. Шабалов)의 연구에서도 제기되었죠.
역사적으로 고대 몽골인에 속하거나 철륵, 치길, 푸구 등의 튀르크족에 속한다는 두 가지 가설을 가진 키르기스스탄의 부구족 사람들은 유전학적으로 하플로그룹 R1a1이 주를 이룹니다. 이들은 서유라시아계통의 유전자로 주로 코카서스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모두 종합해보면 꽤 흥미로운 가설이 등장합니다. 부구족은 고대몽골인과 튀르크족과 코카서스인의 피를 이어받은 동서양을 이은 키르기스스탄의 한 부족일 수 있다는 것이죠! 자세한 것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지금 키르기스스탄의 부구족들은 서양적인 요소와 이슬람적인 요소, 유목민적인 요소를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의 사슴 사랑은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래동화나 소설, 시에서부터 부구-에네(Бугу-Эне)라는 도로와 부구(Bugu)라는 이름의 레스토랑과 호텔, 상점, 시장까지 다양한 곳에 '사슴'을 뜻하는 단어를 쓰고 있죠. 그 사슴에서 태어난 '사슴족(부구족)'은 지금도 키르기스스탄에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